[한국 야구 도전사]

여자야구가 깨어나고 있다. 국내 최초 여자야구경기가 열린 지 1세기 만에 한국 여자야구선수들이 야구 본고장 미국에 진출한다. 첫 남자 경기가 열린지 93년 만에야 최초의 공식 여자 선수가 경기에 나오는 등 야구사의 그늘 속에 있던 여자야구가 오랜 뒤안길에서 벗어나 햇빛 속으로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 때마침 여자 야구 예능프로그램 채널A ‘야구여왕’이 출범하면서 여자 야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그들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한국 여자 야구 발자취를 짚어 본다.
● 뜨거웠던 첫 관심… 그리고 오랜 침묵
국내 최초 여자 야구 경기는 1925년 3월 5일 경남 진주 시원여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마산사립의신여학교와 시원여학교 간의 대결이었다. 의신여학교 해당 연도 졸업생 14명이 이곳을 찾아 방문 경기를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여자계의 야구전은 조선 처음이므로 상당한 흥미를 끌었다”고 전했다. 경기는 시원여학교 측이 ‘약간 미숙한 점이 있어서’ 1회부터 1-7로 밀렸다. 9회까지 치러진 경기는 48-40으로 의신여학교 승리로 끝났다.국내에 야구가 전해진 때는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1904년. 국내 최초 야구 경기가 열린 건 2년 뒤인 1906년이다. 초창기 선수들은 고의적삼을 입고 짚신을 끈으로 매어 신고 경기했다. 외야수는 맨손으로 공을 잡고 방망이는 단 한 개를 두 팀이 번갈아 썼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선수들이 ‘유니폼 입고 스파이크 신고’ 출전했다. 이때 신문에서 짚신 신고 경기했던 초창기 모습을 이미 “상상할래야 상상할 수 없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일이다”고 한 걸로 보아 야구 여건이 크게 개선됐음을 알 수 있다. 야구는 1960∼1970년대 열광적인 고교야구 인기 시대를 지나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남자 중심이었다. 여자 쪽에는 선수도 팀도 없었다.
● 남자들 사이 1명의 여자선수… 95년 만의 등장
이 오랜 침묵은 1999년 한 선수로 인해 깨졌다. 그해 4월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덕수상고와 배명고의 준결승전. 야구 명문 덕수상고의 선발투수로 여자 선수 안향미가 나섰다. 던진 공은 단 3개.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3번째 공이 상대 선수 몸에 맞아 출루를 허용하며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여자 최초로 공식 경기에 출전했다는 역사를 썼다. 야구도입 이후 95년, 남성들의 첫 야구 경기 이후 93년 만이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서울시교육청에 요청해 여자도 야구 특기생이 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그는 국내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온라인을 통해 선수를 모아 2004년 국내 최초 여자 야구팀 ‘비밀리에’를 창단했다. 비밀리에는 그해 일본에서 열린 제4회 여자야구월드시리즈에 참가했으나 일본에 0-53으로 지는 등 전패했다.
● 라멘집, 접골원… ‘열정’과 ‘생존’사이에서
국내에 실업팀이나 프로팀이 없기에 선수들에게는 운동과 생계 활동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한국 대표팀 에이스 김라경은 여자 야구가 좀 더 활성화된 일본의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뛰면서도 생계를 위해 유소년 야구교실, 일본 라멘집 등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방송을 통해 접골원 보조로 일하며 운동한다고 밝혔다. 한국 여자 야구를 키워왔다고 할 수 있는 사회인 야구 여자팀 선수들의 직업은 골프 캐디, 미용사, 교사, 회사원, 주부, 학생, 가게 점원 등 다양했다.
연맹 관계자는 “국제 대회에 나가고 싶어도 지원해 주는 곳이 없어 선수들이 자비로 참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재 고등학교 대학교 및 프로구단에서도 여자 입단 제한 규정은 없다. 그러나 남성 위주의 숙소 및 팀 문화, 체력 차이 등으로 인해 여자 선수들이 넘기 힘든 장벽이 세워져 있다. 여자 선수들은 대개 남녀가 함께 뛸 수 있는 리틀야구단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뛰다가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로 옮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생활인으로서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들이 계속 운동할 수 있도록 고등학교, 대학교, 실업 팀 등 연속적인 루트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수술 딛고, 골프서 전향… 비상(飛上)을 꿈꾸다
시속 110km대의 공을 던지고 타격도 뛰어난 국가대표 김라경은 팔꿈치 수술을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12살 때 리틀야구 여자 최연소 홈런을 쳤던 박민서는 골프 선수로 전향했으나 미국 여자 프로야구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국가대표 유격수 박주아는 내야의 수준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는 평을 받는다. 국가대표 포수 김현아는 국내 선수 중 가장 높은 1라운드 4순위로 지명됐다. 그는 3루수와 유격수를 하다 포수로 포지션을 바꾼 지 6개월밖에 안됐지만 투수 리드나 주자 견제 가 뛰어나다. 그는 지난해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컵 대회에서 7경기 15타점으로 타점 1위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그는 “드래프트에서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인정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예상보다 빠른 순번에 놀랐다”고 했다. “여자야구란 만들어진 길이 아니고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미래를 알 수 없는 도전과 선택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함과 두려움이 많은 것 같다”는 그는 이번 WPBL 진출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이제는 인정받고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했다.
한국 프로야구 관객은 지난해 1200만 명을 넘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조사한 2024년 프로야구 관중 성향을 보면 남성 44.5%, 여성 55.5%로 여성 비율이 높다. 여성 팬들의 높은 비중은 곧 ‘보는 야구’에서 ‘하는 야구’로 전환할 여성들이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야구에 대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채널 A는 핸드볼 김온아, 육상 김민지, 소프트볼 선수 출신으로 한화이글스 치어리더였던 노자와 아야카 등 각 방면의 정점에 섰던 인물들이 여자 야구에 도전하는 내용의 ‘야구여왕’을 방영 중이다. 이들은 국내 50번째 여자야구단이라 할 수 있는 ‘블랙퀸즈’를 결성했다. 골프여제 박세리가 단장, 야구스타 추신수가 감독이다. 전국 대회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들은 다양한 화제를 낳으며 눈길을 끌고 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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