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보복성 탄핵 추진으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일 갑자기 사퇴하면서 한국은 글로벌 통상전쟁 중 경제 사령탑을 잃는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됐다. 특히 앞으로 4년 이상 한국의 무역 여건을 결정할 한·미 통상 협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경제부총리가 공석이 돼 협상력이 약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당장 이번주부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와 체코 원전 수출 계약식 등 최 전 부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던 일정이 취소되거나 행사 규모가 축소됐다.
◇ “대미 공동 대응 기회 놓쳐”
2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4~7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ADB 연차총회에 최지영 국제경제관리관을 파견한다. 원래는 최 전 부총리가 참석해 한·일·중, 한·일, 한·인도 재무장관 회의를 연달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측 참가자가 실장급으로 바뀌면서 한·일 재무장관 회의를 비롯한 주요 일정이 취소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우리와 함께 미국의 통상 압력을 집중적으로 받는 일본 중국 인도와 협상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할 기회를 잃었다”며 아쉬워했다.
오는 7일 체코에서 열리는 두코바니 원전 수출 계약식도 축소된다. 당초 양국 정부는 체코 역사상 최대 규모(약 26조원) 사업임을 감안해 두 나라 정상이 공동 서명하는 행사를 기획했지만 최 전 부총리 사임으로 불발됐다. 한때 이주호 대통령 권한대행의 참석이 검토됐으나 촉박한 일정 때문에 없던 일이 됐다. 7일 서명식에는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참석해 작은 규모로 치러질 예정이다.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 회의)와 경제관계장관회의, 산업경쟁력강화관계장관회의 등 경제부총리가 주관하는 경제 부처 장관 회의도 무게감이 떨어지게 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김범석 기재부 1차관이 장관 직무대행으로 회의를 주재하지만 차관이 각 부처 장관을 소집하는 형태로는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달 중순 경제관계장관회의 등을 열어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등 시급한 산업 과제를 처리할 예정이었다.
◇ 대외 신용도 악영향 불가피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대미 협상력 약화다. 최 전 부총리는 ‘한미 2+2(재무·통상장관) 협의’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협상 파트너였다. 특히 미국이 통상 협의 주요 주제로 환율 정책을 포함한 상황에 경제부총리가 사라져 우리 정부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됐다.
한 통상 전문가는 “양국 실무 협상은 기존 틀 내에서 계속 이뤄질 것”이라면서도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최 전 부총리가 동시에 사퇴하면서 미국은 우리 협상팀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0여 년째 최고 수준을 지켜온 국가 신용등급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 이후에도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신용등급(AA)을 유지하면서 “헌법 체계에 따라 정치적 리스크가 경제 부문으로 옮아가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국회가 경제부총리 탄핵을 추진하고 이에 따라 최 전 부총리가 전격 사임하는 일련의 사태로 ‘한국 경제가 정치 리스크에서 자유롭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전날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도 이런 이유로 최 전 부총리 탄핵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묵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영효/김대훈/남정민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