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거버넌스는 규제가 아니라 경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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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6.04.30 08:00 수정2026.04.30 08:00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2025년부터 올해까지, 상법이 세 차례 개정됐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고,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강화하고,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까지 담았다. 필요한 논의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켜보며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거버넌스 개선이라는 본질적 과제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언어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회 토론회장에서, 시민단체 성명서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서에서 반복되는 프레임은 하나다. ‘기업을 압박하는 도구.’ 거버넌스는 어느새 개혁의 대상을 향해 겨누는 무기가 됐고, 그 언어에 익숙해진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렸다. 거버넌스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거버넌스가 외부의 압박으로 작동할 때, 기업은 버티는 법을 배운다. 거버넌스가 내부의 철학으로 작동할 때, 기업은 지속하는 법을 안다. 거버넌스를 ‘규제 대응’으로 접근하는 경영진과 이사회는 언제나 한 발씩 늦는다. 법이 바뀌면 대응하고, 주주총회가 다가오면 준비하고, 분쟁이 터지면 수습한다. 이 패턴이 반복되는 기업에서 거버넌스는 비용이다.

반면 거버넌스를 경쟁력으로 설계한 기업들은 다르게 움직인다. SK그룹이 법적 의무화에 앞서 자발적으로 ‘이사회 2.0’을 선언하고, 사외이사 의장 체계를 구축한 것은 규제 때문이 아니었다. AI 전환이라는 경영 현실 앞에서 이사회의 전략적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버넌스를 선제적으로 설계한 기업과 사후에 대응하는 기업의 차이는, 위기가 왔을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 상법 개정이 지향하는 방향, 즉 주주의 권리 강화와 이사회 독립성 제고는 글로벌 논의와 묘한 엇박자를 이루고 있다. 2019년 미국 주요 기업 181명의 최고경영자가 서명한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선언은 수십 년간 유지해온 ‘주주 최우선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주주 이익을 마지막에 배치하고, 고객·직원·협력사·지역사회를 먼저 언급했다. 유럽연합은 한발 더 나아가 협력사를 포함한 공급망 전체의 인권과 환경을 기업의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지침을 채택했다. 세계는 주주 중심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해관계자 전체를 향해 기업의 책임 반경을 넓히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 이 논의가 낯설 리 없다. 오히려 한국은 이 방향의 선배다. 협력사와 40년 넘게 거래를 이어가는 완성차 기업, 설 명절마다 협력사에 납품대금을 미리 지급하는 대기업들,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 자체 재원을 투입해온 소재·부품 기업들. 이것은 규제가 만든 풍경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해온 방식, 대기업과 협력사 생태계가 운명공동체로 연결돼온 역사가 만든 문화다. 한국 사회가 기업에 대해 주주 이상의 도의적 책임을 기대해온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실천의 역사는 글로벌 기준으로도 충분히 설명되고 평가받을 수 있는 자산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 기업이 이미 실천해온 다이해관계자 경영의 원형을, 어떻게 체계화하고 제도화하고 투명하게 소통할 것인가.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이 만들어온 거버넌스의 가치를 주주, 투자자, 고객사, 협력사, 임직원, 지역사회, 그리고 국민에 이르는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먼저 설명하는 것이 진짜 거버넌스다. 거버넌스의 주체는 외부 압박이 아니라 경영진과 이사회여야 한다. 그것이 K-거버넌스의 출발점이다.

<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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