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플릿은 어디인가? 황제의 은퇴레시피[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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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 은퇴 이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계획을 어떻게 세울까 고민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준비는 물론,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많이 묻게 됩니다.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페리스타일 광장.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페리스타일 광장.

이럴 때는 1700년 전 ‘은퇴 선배’ 이야기를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의 로마황제들은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되거나, 강제폐위 당하거나 하는 식으로 타의에 의해 권력을 놓았습니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험한 꼴을 당했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그런데 로마제국의 제43대 황제였던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311)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고향 인근 따뜻한 햇살이 아름다운 해변도시에 궁전을 짓고 채소를 키우며 은퇴생활을 하다가 갔습니다. 절대 권력자가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생활을 즐긴 로마 황제는 그 전과 후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종탑에서 내려다본 아드리아해.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종탑에서 내려다본 아드리아해.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라 불리던 3세기 말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로마 제국을 구해낸 통치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 암살, 군부 쿠데타, 외부의 야만족 침입으로 인해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려 있었죠. 그는 로마제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눠 다스리는 사분통치제(Tetrarchia)를 만들었고, 행정 개혁과 세금제도 정비로 로마를 재건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 사분통치 지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 사분통치 지도.

그런데 305년 5월. 황제는 예상 밖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은퇴했죠. 로마 제국 건국 이후 몇 세기 동안 암살당하거나, 폐위당하거나, 추방당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은 첫 번째 황제였습니다. 황제는 재위 21년 동안 니코메디아(현재 터키의 아타톨리아 지역)에서 주로 아시아 소아시아 지역, 이집트를 통치했는데요. 그는 은퇴지로 발칸반도의 해안도시 스플리트(Split)를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난 고향이 스플리트에서 가까운 크로아티아 솔린(당시의 살로나)이었기 때문이었죠. 노예 또는 하급 관리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디오클레스는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대장으로 일하다가 황제로 추대됐고, 21년간 제국을 통치한 후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이 시작된 그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은퇴 전 약 10년에 걸쳐 스플리트에 궁전을 지었습니다. 호화로운 휴양지와 견고한 요새를 융합한 복합 건축물이었죠. 궁전의 규모는 약 3만8000㎡. 축구장 약 5개 정도의 면적입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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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중심에는 페리스타일(Peristyle)이라는 거대한 열주가 있는 안뜰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매일 아침 관리들과 만나고, 예식을 진행하는 권력의 중심 공간이죠. 이 곳에 가보니 광장 기둥 아래에는 검은색 화강암 스핑크스가 놓여져 있었는데요.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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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500년 전인 이집트 투트모스 3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스핑크스입니다. 궁전에는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12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다는데요. 현재는 3개의 스핑크스가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 얼굴이 훼손돼 있지만 페리스타일 광장의 스핑크스는 가장 온전한 상태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페리스타일 광장의 스핑크스.

페리스타일 광장의 스핑크스.
스핑크스 맞은 편 카페의 이름은 ‘룩소르(LVXOR)’. 비엔나식 크림 커피가 유명한 카페입니다. 손님들을 위해 페리스타일의 돌 계단 위에 쿠션을 펼쳐놓았는데요. 손님들은 돌기둥에 등을 기대고, 발은 고대 로마의 광장에 내려놓고, 스핑크스를 마주보며 커피를 마십니다. 로마 황제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카페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페리스타일 광장에 있는 룩소르 카페 계단석.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페리스타일 광장에 있는 룩소르 카페 계단석.
페리스타일을 지나면 돔모양의 지붕을 가진 연결 통로가 나옵니다. 황제가 손님을 만나는 알현실로 쓰이던 베스티뷸(Vestibule) 공간이죠. 높이 17미터, 지름 12미터의 원형홀 정상에는 둥그런 구멍인 ‘오큘러스(oculus)’가 뚫려 있는데요.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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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판테온에서도 볼 수 있는 돔 지붕의 원형 구멍입니다. 그 사이로 푸른하늘이 보이네요. 구멍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벽에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타원형의 햇빛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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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큘러스는 최고의 음향효과도 만들어냅니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면 동굴처럼 잔향이 너무 길어 소리가 먹먹하겠지만,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어 적절한 잔향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소리를 하늘과 우주로 연결시켜 주는 공간이네요.


이 방에서는 ‘클라파(Klapa)’라고 부르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의 전통 민속음악이 상설공연됩니다. 남성 4명이 반원형으로 서서 아무런 반주없이, 목소리만으로 실크처럼 섬세한 화음을 만들어내 감탄을 자아냅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두브로브니크가 ‘킹스랜딩’의 무대였다면, 스플리트는 데너리스 타르가리엔이 군대와 용을 끌고 왔던 ‘미린’이라는 또다른 세계관의 촬영지였습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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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밑에는 높이 10미터, 길이 50미터가 넘는 지하공간이 있는데요. 전체 궁전의 약 8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입니다.


‘왕좌의 게임’에서 대너리스가 키우던 용 세 마리가 갇혀 있던 ‘용의 던전(Dungeon)’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지요.


현지 해설 가이드는 “중세 이후 1000년간 주민들이 지하공간에 버린 쓰레기와 배설물들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시대에 석조로 지어진 지하공간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는데요.


19세기에 대대적인 지하공간 발굴작업 끝에 로마시대 황제의 지하 궁전 유물을 복원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로마시대의 신전과 기도실, 우물과 하수도관, 황제의 식탁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테이블, 와인과 올리브유를 짜내던 프레스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광장 옆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이었던 팔각형 돔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으로 쓰이고 있죠.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 내부 돔지붕.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 내부 돔지붕.

3세기 살로나의 주교였던 성 도미니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박해 중에 참수된 순교자였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황제의 무덤이, 황제가 참수한 기독교 순교자의 유해를 안치하는 거룩한 성소(聖所)로 변모된 것입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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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니우스 대성당 옆에는 높이 57m에 이르는 종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페리스타일 광장에서 점점 시야가 확대되면서 아드리아 해안까지 스플리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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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깍깍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쳐다봤더니,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와 붉은색 지붕이 보이는 종탑 꼭대기 기둥 아래에 하얀색 갈매기가 앉아 있네요.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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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을 나와 바다쪽으로 나가보면 요트가 정박해 있는 항구가 나옵니다. 해변에는 길이 500미터, 폭 40미터 정도의 직선거리인 ‘리바(Riva) 프롬나드’가 이어지는데요. 낮에는 관광객들로 들썩이지만, 해질녘이면 크로아티아 현지인들이 몰려나와 이웃과 친구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는 거리입니다. 매일 저녁 일상의 의식처럼 반복되는 이런 저녁 산책을 ‘코르조(Korzo)’라고 부른다네요. 리바 프롬나드는 산책길을 넘어 ‘스플릿의 거실(Living room)’ 역할을 합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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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스플릿에서 6년간의 은퇴생활 동안 채소를 기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양배추를 좋아했다고 하네요. 1700년 전 황제의 ‘은퇴레시피’는 현대인에게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크로아티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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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스플리트는 어디일까? 나만의 궁전은? 나는 은퇴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내가 평생 해보지 않았던,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스플리트 올드타운 뒷골목.

스플리트 올드타운 뒷골목.

스플리트(크로아이타)=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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