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25 |
사무실 밖 서울 청계광장, 모 정당 대통령 선거 후보가 출정식을 벌인다. 후보가 연단에 오르기 전, 가사를 홍보 문구로 바꾼 가요 ‘남행열차’ ‘아파트’ ‘질풍가도’가 어지럽게 흐른다. 남행열차, 아파트는 40년 넘은 곡이다. 그나마 ‘최근’ 노래가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 질풍가도다. 20년 됐다. 선거 유세 방식은 절차적 민주화 과정에서 치른 38년 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과 주변에서 연일 치러지는 크고 작은 다양한 노조 집회나 서울 세종대로 몇 개 차로를 점거하고 벌이는 양대 노총 시위도 마찬가지다. 35년 전 대학에 들어갔을 때 들었거나 불렀던 노동가요가 그대로 흘러나온다. 탑차를 개조해서 만든 무대에 오른 진행자나 초청 인사의 구호 외치는 방법과 연설의 톤도 똑같다. 참가자들은 진지한 목적이 있겠지만,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느니 하는 철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느 단편소설 등장인물이 한 ‘생각이나 마음은 행동거지로 표현된다’는 취지의 말에 동의한다.(‘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현대문학, 2014) 대한민국의 삶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아이폰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2010년부터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세계 질서는 미증유의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처럼 급격하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삶의 양태를 담아낼 개념조차 못 만들고 있다.정치인들이 세상을 보는 프레임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백년대계가 절실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나라를 이끌겠다는 사람들의 공식 선거운동 첫 일성(一聲)이 “내란을 종식시키겠다”거나 “가짜 진보를 찢어 버리겠다”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에 불과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기술 관련 공약도 주먹구구식 숫자 앞세우기에 그친다는 느낌이다.
대선 일정이 급작스레 당겨져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치인들의 제한된 시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다보는 시간은 길어야 대통령 레임덕이 시작된다는 임기 4년 차 전까지고 짧으면 다음 달 3일이다. 바라보는 공간은 헌법이 정한 대한민국 강역조차 아닌 휴전선 남쪽뿐이다. 닫힌 시공간에서 진보와 보수의 이념은 사라지고 카르텔의 이해관계만 남는다. 추구하는 가치가 사문화한 강령에나 존재하는 정당은 BTS나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 KIA 타이거즈나 LG 트윈스 같은 프로 구단과 진배없이 팬덤을 좇는다.
내가 생각하는 제국의 조건 중 하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K팝 아이돌 공연장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팬들이 한국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수십 개 국가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아이돌 댄스를 커버한다. 우리 ‘몸짓 언어’를 따라 해 유튜브에 올린다. 이 같은 일은 대중문화에서일 뿐 다른 영역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제국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그 꿈은 시공간의 한계를 더욱 넓히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그녀를 지키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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