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주업계가 동남아시아에 생산 거점을 잇따라 세우고 있다. 그동안 국내에서 만든 소주를 해외로 보내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에서 생산하고 주변국으로 다시 수출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이트진로가 베트남에 해외 첫 생산기지를 짓는 데 이어 충청권 기반의 선양소주도 미얀마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K푸드 인기에 올라탄 소주가 단순 수출품을 넘어 아세안 시장을 겨냥한 현지형 주류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웅래 선양소주 회장의 '파격 실험'
8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선양소주는 미얀마 양곤주 흐머비 타운십에 소주 공장을 짓고 있다. 완공 시점은 이르면 올해 말이다. 이번 해외 생산기지 사업은 조현준 부사장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양소주는 충청권을 대표하는 지역 소주업체다. 올해 68세인 조웅래 회장이 직접 제품 기획과 브랜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 최저 도수와 저칼로리를 앞세운 ‘선양’에 이어 말차 소주, 오크 숙성 콘셉트 제품 등 기존 희석식 소주와 다른 제품을 잇따라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조 회장이 직접 제품 모델로 나서는 등 브랜드 전면에 등장한 것도 주류업계에서는 이례적이다.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선양소주의 지난해 매출은 525억1112만원으로 전년보다 9.3% 늘었다. 영업이익은 67억4589만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국내 소주 시장이 정체된 가운데 지역 소주업체가 제품 혁신으로 실적 반등을 이뤄낸 셈이다.
선양이 10여 년 전부터 공들여온 미얀마 공장은 동남아 진출 전략의 핵심 거점이다.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아세안 역내 무관세 혜택을 활용해 태국과 베트남 등 주요 시장의 관세 장벽을 낮출 수 있다. 미얀마 공장에서는 선양의 대표 제품인 저도수 소주 ‘선양’과 과일소주 3종을 생산할 예정이다. 선양소주는 우선 미얀마 내수 시장을 확보한 뒤 중국, 인도, 태국, 라오스 등 인접국 수출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하이트진로도 '베트남'에 해외 첫 생산기지
하이트진로도 베트남에 해외 첫 생산기지를 짓고 있다. 하이트진로 베트남 공장은 타이빈성에 약 8만2083㎡ 규모로 조성된다. 완공 목표 시점은 2026년이다. 연간 최대 생산능력은 약 500만 상자로 알려졌다. 하이트진로는 이 공장을 동남아 시장 확대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주목할 점은 해외 생산기지 경쟁에 대형 소주업체뿐 아니라 지역 소주업체까지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선양소주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성장한 지역 주류회사다. 과거 지역 소주는 해당 권역 내수 시장 의존도가 컸지만 최근에는 제품 차별화와 해외 판로 개척을 통해 성장 한계를 돌파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미얀마 공장 추진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순히 생산비를 낮추기 위한 해외 진출이 아니라 지역 소주 브랜드가 국내 시장의 울타리를 넘어 아세안 소비자를 직접 겨냥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선양소주가 미얀마 공장에서 일반 소주뿐 아니라 과일소주 3종을 함께 생산하려는 것도 현지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를 겨냥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소주는 귀한 술"…수출 넘어 현지형 주류로
국내 소주업체들이 동남아 생산기지 확보에 나선 것은 물류비와 관세 부담을 줄이면서 현지 수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과거 해외 소주 시장은 교민과 한식당 중심으로 형성됐다. 최근에는 K팝 K드라마 한식 확산에 힘입어 현지 젊은 소비자들이 소주를 직접 찾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는 소주가 일상주를 넘어 특별한 날 마시는 술로 인식되고 있다. 현지 소비자들이 생일잔치나 모임에서 한국 소주를 꺼내 마시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 드라마 속 회식 장면과 한식당 문화가 확산되면서 소주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한국식 분위기’를 소비하는 상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과일소주는 동남아 시장에서 진입 장벽이 낮은 제품으로 꼽힌다. 알코올 도수가 상대적으로 낮고 단맛이 강해 기존 증류주보다 가볍게 소비할 수 있어서다. 맥주와 위스키, 럼 등 기존 주류에 익숙한 소비자에게도 과일소주는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K주류 입문 제품이 될 수 있다.
현지 생산은 가격 경쟁력에도 직접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 완제품을 수출하면 운송비와 통관 비용, 현지 유통 마진이 붙는다. 반면 현지 공장에서 생산하면 병과 포장재, 물류 일부를 현지화할 수 있어 판매 가격을 낮추거나 유통망 확장에 필요한 마케팅 비용을 확보하기 쉽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클럽, 한식 프랜차이즈 등으로 판로를 넓히는 데도 유리하다.
동남아 공장은 주변국 수출을 위한 허브 성격도 갖는다. 베트남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반도 주요 시장과 연결돼 있다. 미얀마는 중국, 인도, 태국, 라오스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선양소주가 흐머비 공장을 아세안 네트워크의 물류 허브로 활용하려는 것도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겨냥한 것이다.
K소주, 생산망 경쟁으로 확장
업계에서는 소주 수출 경쟁이 브랜드 홍보전에서 생산망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시장은 인구 감소와 주류 소비 둔화로 성장 여력이 제한적이다. 반면 동남아는 젊은 인구 비중이 높고 한국 콘텐츠 소비가 활발해 K주류 확장 가능성이 큰 시장으로 꼽힌다.
다만 과제도 적지 않다. 현지 주류 규제와 환율, 정치 리스크, 유통망 확보가 변수다. 미얀마는 정세 불안과 물류 리스크가 상존하는 시장인 만큼 생산기지 조성 이후 안정적인 판매망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베트남 역시 현지 주류업체와 글로벌 브랜드의 경쟁이 치열해 단순한 한류 마케팅만으로는 시장을 넓히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해외 소주 시장은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출하는 단계에서 현지 생산과 현지 유통을 결합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며 “동남아 공장은 K소주의 가격, 물류, 유통 경쟁력을 동시에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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