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스 반 노튼은 손끝에서 탄생한 아름다움을 증명해 온 디자이너다. 그가 제61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4월 25일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에서 장인 정신의 미학을 주제로 한 전시의 막을 올렸다.
벨기에 앤트워프의 3대 테일러 집안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엔 늘 원단의 질감과 재단의 풍경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군복이나 남은 원단 등을 활용해 새 옷을 만들던 재단사였고, 아버지는 제냐나 페라가모의 의류를 취급하는 패션 부티크를 운영했다.
어머니는 빈티지 레이스나 린넨을 수집하는 등 유년 시절부터 옷이 장인의 손을 거쳐 생명을 얻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옷에 대한 남다른 시선을 키울 수 있었다.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면서는 이를 더 확장해나갔다. 인도의 자수 장인들과 30년간 파트너십을 맺는 등 손으로 빚어낸 것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앞장서왔다.
그런 그가 지난 2024년을 끝으로 자신이 이끌던 패션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파트너 패트릭 반헬루베와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드리스 반 노튼 재단(Fondazione Dries Van Noten)을 설립하며 새로운 행보를 예고했다. 재단은 베네치아 대운하를 따라 산 폴로 중심부에 자리 잡은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Palazzo Pisani Moretta)에 둥지를 틀었다.
15세기 설립된 이곳은 18세기 한 차례 개조를 거쳐 서로 다른 시대의 미감이 한 건물에 공존한다. 장밋빛 파사드에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아치형 연속 창문이 눈에 띄는 외관과 화려하고 대담한 바로크·로코코 특유의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저택 내부에는 지암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천장화를 비롯해 당대 화가들이 벽에 그려넣은 그림들이 우아함을 더한다. 빼어난 건축적 아름다움으로 사교계 모임의 중심에 섰던 이곳은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과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 요제프 2세의 발길이 이어지며 사랑받았다.
전 세계 곳곳에서 길어 올린 크래프트맨십의 가치
드리스 반 노튼은 이곳에 손을 거쳐 완성된 아름다움들을 모았다. 지난 4월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에서 개막한 전시 ‘유일한 저항은 아름다움뿐(THE ONLY TRUE PROTEST IS BEAUTY)’는 재단이 써 내려갈 서사의 첫 장이다. 재단은 드리스 반 노튼이 구축한 장인 생태계를 보호하고 예술적 가치를 계승하는 일 등 모든 형태의 장인 예술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드리스 반 노튼과 패트릭 방헬루에는 “우리는 아름다움을 하나의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바라본다”고 말한다. 또한 “이번 전시는 더 오래 바라보고, 답이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 머무르며, 개념과 장인정신이 만나는 제작 행위가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지를 발견해볼 수 있도록 일깨운다”고 소개한다.
그가 직접 큐레이팅한 200여 점의 작품들은 20개의 방을 따라 진다. 패션부터 유리 공예, 도예, 주얼리, 사진, 가구, 디자인,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경계는 느슨해지고 장인정신이 공통의 언어가 된다. 뜻밖의 조합으로 새로운 장면을 감상하는 것이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발견의 방식이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작가들의 작품 옆엔 실제 제작 과정이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이 함께 해 관람객과 창작자 간의 대화를 돕는다.
한 벌 한 벌 곧 서사가 된 오트 쿠튀르
다양한 예술품 중 패션은 전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주제의 첫 번째 공간은 꼼데가르송과 크리스찬 라크르와의 실루엣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두 점의 새하얀 오트 쿠튀르 의상 맞은편으로 새까만 의상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 옆에 놓인 조각 작품과는 닮은 모습으로 리듬을 만든다. 영국 출신의 조각가 케이트 맥과이어가 흰 비둘기의 깃털을 활용한 작품은 꼼데가르송 드레스의 추상적인 구조와 조응하며 드리스 반 노튼의 의도대로 관람자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든다.
전시장 중앙에 가벽처럼 세운 눈 감은 소녀의 사진은 평온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캐나다 출신의 작가 스티븐 시어러가 촬영한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주얼리하우스 코도냐토(Codognato)의 메멘토 주얼리로 그 감정을 이어가도록 한다. 해골, 뱀, 모래시계 등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은 장신구는 어둠과 장식의 미학을 함께 이야기한다.
작품들은 저택의 방들과도 대화를 나눈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은 방들은 아티스트의 작품과 만나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간다. 수장고로 쓰였던 방에는 의자가 빽빽이 들어찼다. 18세기 사용하던 의자를 비롯해 벨기에 디자이너 리오넬 자도가 할머니의 오래된 의자를 활용해 만든 작품이 꼼데가르송의 헤드피스와 공명한다.
한때 음악실이었던 공간은 역사와 기술이 이중주를 이룬다. 이곳의 중앙에는 장인정신의 정수를 응축한 작품이 금빛으로 빛난다. 프랑스 조각가 조셉 아르주마노프를 중심으로 총 23명의 장인이 함께 작업한 ‘몽상의 체스판(L’Échiquier des Songes)’이다.
미니어처 극장처럼 꾸며진 이 작품은 로봇 팔이 체스 말을 움직이며 서사를 빚어낸다. 이 작업에는 3D 모델링과 AI 프로그래밍, 로보틱스의 현대 기술과 함께 보석 및 금 세공, 무라노 유리 공예, 아르메니아 화산석 조각까지 공예가 한데 얽혀 손끝으로 빚어낸 예술과 정교한 기술이 완성한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커틀러리나 버려진 유리 등을 활용하는 영국 예술가 앤 캐링턴의 조각,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예가 카오리 쿠리하라의 과일과 식물의 형태를 재해석한 도자, 네덜란드 디자이너 요리스 라르만의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가구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베네치아=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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