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와 존중 사라진 정치 행태 준엄히 심판
대통령-국회, 견제장치 취지 경시한 채 악용
‘칼집 속 劒’ 자제력 잃으면 민주주의 상처 내
불법 계엄과 대통령 파면이라는 격변을 겪고 나서도 정치는 달라진 게 없다. 상대 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만이 난무하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치는 집단”으로 싸잡는다. 이에 맞서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잠재적 범죄자인 이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에만 골몰하는 집단”이라고 폄하한다. 양당 모두 서로를 합의를 모색할 대화 상대로 존중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헌재 결정 이후 국민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정치권은 6·3 대선을 겨냥해서 정치를 더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 국민의 선택지는 사실상 양당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독과점적 정당 구도가 이들에게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할 수 있는 뒷배가 되는 모양이다.
4일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 당시에는 관심이 온통 파면 여부에만 쏠려 주문이 선고되기에 앞서 약 20분간 낭독된 결정문 내용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후 결정문 전문을 숙독하니 민주주의 원칙과 한국 정치의 문제들이 확연히 보였다.헌재는 결정문 서두에서 탄핵 청구인(국회)과 피청구인(윤석열 전 대통령) 양측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한 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제1항으로 결론을 시작한다. 헌재는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는 다원적 세계관을 강조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헌재의 이러한 견해는 이미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판결문에 명시돼 있다.
헌재의 결정문을 좀 더 인용해 본다. 헌재는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하지 않고 배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물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거듭해서 일방적으로 국회의 권한을 행사했고, 대통령이 이에 대해 권력의 남용이라거나 국정 마비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정치적으로 존중돼야 한다고 봤다.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하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헌재는 대통령과 야당이 공히 견제와 균형, 협치라는 헌법의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조율되고 해소돼야 할 정치의 문제”를 정치로서 다루지 못한 것이 작금의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헌재의 판단을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는데도 여전히 국민의힘은 계엄의 근본적 원인 제공자로 민주당을 탓하고, 민주당은 이참에 국민의힘을 더욱더 궁지로 몰기 위해 ‘명태균 특검법’, ‘내란 특검법’ 등의 재표결을 준비하고 있다. 벤 앤셀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제도와 규범의 파괴가 정치 실패의 핵심적 이유라고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제도’란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법과 규칙, 조직을 뜻한다. 제도가 붕괴되면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듯 힘이 정의가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제도의 붕괴란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무질서 상태뿐만 아니라 제도의 원래 취지가 경시되고 제도가 악용되는 상황도 포함된다.대통령의 법안 재의요구권(거부권)과 국회의 재의결권이란 제도는 상호 견제 장치를 통해 입법의 신중성을 높이려는 게 당초 취지다. 또 국회에 탄핵 권한이 아니라 탄핵소추권만을 부여하고 헌재가 탄핵의 최종 심판 권한을 갖도록 규정한 것은 국회의 자의적 탄핵 시도를 방지하려는 의도를 함의한다. 권한 남용을 방지하려는 제도적 의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이 법안 거부권을 25차례 행사하고, 국회가 30차례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는 사실이 현재 우리 정치의 제도 붕괴와 규범 경시를 여실히 보여준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헌재의 결정문에서 보듯이 지금의 정치 위기 책임에서 어느 정치 세력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는 상대 정당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 하는 것이다. 대통령도, 국회도 각각에게 주어진 헌법적 권한의 한계를 명심하지 않고 자제력을 잃으면 민주주의는 상처를 입는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