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옵션: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허하라"[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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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고객님, 디폴트 옵션을 선택해 주셔야 합니다. 법이 바뀌어서 의무적으로 고르셔야 해요.” 최근 은행이나 증권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은 직장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전화를 받은 김 대리는 당황스럽습니다. 투자는 잘 모르겠고, 뭔가는 골라야 한다고 독촉하니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제일 안전한 게 뭐예요?” “네, 원금 보장되는 예금형 상품이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해주세요.” 이것이 한국형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현주소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디폴트(Default)’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값’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가입자에게 “당신의 디폴트 옵션을 직접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기본값’을 ‘선택’하라니, 이는 제도의 본질적인 취지와 맞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2006년 미국, 엔론이 남긴 교훈 앞 장에서 본 것처럼, 401(k)는 기업의 책임을 개인 계좌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넘겼다고 해서 개인이 곧바로 현명한 투자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미국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401(k) 가입자들에게 “상품을 고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겁을 먹고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단기자금이나 예금으로 도망쳤습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2001년 벌어진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의 파산이었습니다. 회사가 방치한 상태에서 수많은 직원이 퇴직연금 자산을 자사주에 집중 투자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파산하자 노후 자금까지 함께 사라졌습니다. 스터드베이커 사건의 401(k) 재현이었던 셈입니다. “개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다”라는 뼈아픈 교훈이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이 교착 상태를 깬 것이 2006년 제정된 연금보호법(PPA, Pension Protection Act)입니다. 이 법은 자동가입의 확산을 도왔지만, 이 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입니다. 가입자가 아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그 돈을 어디에 둘 것인가. 미국은 이 질문에 적격 자동 투자 상품, 즉 QDIA로 답했습니다. 구조는 단순했습니다. 근로자가 아무런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기업이 미리 선정한 적격 투자상품으로 돈이 들어갑니다. 그 적격 상품은 TDF 같은 생애주기형 펀드, 밸런스드펀드, 전문관리계좌처럼 장기 은퇴자산 운용에 맞는 상품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이 절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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