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퇴직한 후배에게 전하는 말[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2 days ago 5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아끼는 후배의 소식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접했다.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다. 은사님의 개인전에 한쪽 공간을 내어 받은 듯했다. 투박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림이었다. 늘 그 친구가 궁금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제 마흔을 갓 넘긴 후배는 30대 후반에 직장을 떠난 뒤 여전히 구직 중이다. 처음 소셜미디어에 근황을 올렸을 때는 다부진 포부가 느껴졌지만 이후 행적은 소소한 취미 생활이 전부였다. 간혹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는 짧은 글에서 침울한 심경도 느껴졌다.

사실 요즘 40대 퇴직자는 그리 낯설지 않다. 교육 강좌나 커뮤니티에 가보면 생각보다 많은 40대를 볼 수 있다. 그들 상당수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몇 년째 아르바이트로 전전하거나 아예 자영업으로 전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퇴사인 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 퇴직이었다는 어느 40대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들은 50대 이상 퇴직자와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한창 일할 나이라는 인식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자녀 학비와 가계 대출 등 한꺼번에 몰린 경제적 부담으로 버거워했다. 재기에 대한 욕구는 크지만, 조급함과 불안감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다. 퇴직한 지 5년이 지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첫째, “퇴직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오 과장은 중견기업에서 영업을 담당했다. 당시 나이는 마흔셋. 회사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발표하고, 희망퇴직자를 모집했다. 이때 오 과장은 결단을 내렸다. 실적 부진에 대한 압박이 심했고 늦기 전에 또 다른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모두가 그를 응원하였지만, 시간이 흘러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퇴직은 그렇게 찾아온다. 오 과장이 유독 업무 능력이 없다거나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었다. 그저 회사가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렸고 그가 그 소용돌이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제의 성과가 내일의 자리를 보장한다는 그것은 이제 옛말이다. 지금은 회사의 방향과 어긋나면 아무 때고 직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

둘째, “빠른 퇴직이 좋을 수 있습니다.” 이 과장은 마흔둘. 브랜드 마케팅팀에서 일하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프로모션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양한 디지털 도구가 도입되면서 그가 공들여 완성한 결과물보다 컴퓨터가 순식간에 만들어낸 시안이 채택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감각과 속도가 중시되며 그는 점점 설 곳을 잃었고, 끝내 회사를 떠나게 됐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은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인공지능(AI)을 쓰지 않고 작업하는 것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된 일도 많아졌다. 이런 환경에서 40대는 아직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나이이자, 해야만 하는 세대다. 실무 경험이 있으면서 체력도 충분하고 새 기술을 익힐 집중력도 갖추고 있다. 어쩌면 이 시기가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조금 이른 퇴직이 오히려 더 나은 길로 이어지는 출구가 될 수도 있다. 셋째, “퇴직은 누구나 겪습니다.” 최 부장은 마흔다섯, 대기업 관리 부서에서 일했다. 줄곧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상사는 그의 업무를 반복적으로 점검했고, 회의에서 그의 의견은 자주 묻혔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후배에게 맡겨지는 사례도 늘어났다. 위로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사, 아래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그리고 그 끝에 조용히 회사를 나왔다.

퇴직은 비단 최 부장만의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숙명이다. 하루하루 묵묵히 일해 왔던 이들조차 결국은 조직의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나는 때를 만나게 된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만의 이유로 퇴직 절차를 밟고 있을 수 있다. 그게 오늘 내일의 차이일 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퇴직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거창하지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퇴직 후의 삶은 대부분 단번에 풀리지 않는다. 한 번에 원하는 목적지에 가려 하지 말고, 현 위치에서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게 필요하다. 바라는 직무가 아니어도, 잠깐의 역할이어도 괜찮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것, 그 자체가 기회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현장 감각을 유지하고 삶의 리듬을 잃지 않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퇴직은 모든 사람에게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내야 하고, 살아내게 된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고 무너지되 다시 회복하는 삶. 그것이 퇴직 후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40대에 퇴직을 접한 이들이 굳건히 일어서기를 바란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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