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스트립의 '미란다' 기가 팍 죽었다…'악마프라다2'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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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할리우드에서 메가 흥행작의 속편 제작은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물론 그 과정은 녹록지 않다. 숱한 화제작이 속편 기획 단계에서 어그러지기 일쑤다. 그렇게 몇 해쯤 지나면 속편에 대한 기대감은 사그라든다. 주연 배우가 나이 들어 본래 캐릭터 이미지를 유지하기 어렵거나, 그새 변해버린 시대상을 시나리오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29일 개봉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이런 점에서 영리한 선택을 했다. 시간을 되돌리려는 대신, 20년의 간극에서 의미를 찾아내 서사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흘러버린 세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새 바뀐 산업 구조와 시대의 권력 구조를 이야기의 중심에 놨다.

#1. 흘러간 시간, 빛바랜 카리스마

권위 있는 패션 매거진 ‘런웨이’의 편집장. 20년이나 흘렀지만,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명함은 그대로다. 명함만 그대로다. 세상은 달라졌다. 부하에게 외투를 벗어 던지던 보스는 이제 낑낑대며 직접 옷을 걸어야 한다. 늘 고개를 가로젓는 수행비서 눈치를 살피는 건 예사다.

런웨이에 설 모델을 두고 으레 내뱉던 단어가 입 안에 맴돌지만 삼간다. “뚱뚱하다” “깡말랐다”는 품평을 했다간 뒷수습이 어렵단다. 예산 삭감으로 출장 항공편은 비즈니스가 아닌 이코노미를 타야 한다. 명품 브랜드가 앞다퉈 머리를 조아렸던 시절도 옛날이다. 이젠 대형 광고주인 그들을 달래러 편집장인 미란다가 출동해야 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여전히 우아하지만 군림할 수는 없게 된 미란다의 처지는 쇠락한 레거시 미디어의 상징이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일군 ‘런웨이’ 역시 예전 같지 않다. 탁월한 안목으로 선별한 커버 스토리, 마감 직전까지 정교하게 다듬은 편집, 반복된 훈련과 퇴고로 가다듬은 문장력이 돋보이는 기사로 완성된 종이매체의 힘은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디지털 플랫폼 앞에 영향력을 잃은 지 오래다.

판매 부수가 줄자 ‘런웨이’ 역시 종이 잡지 발행을 포기하고 온라인 ‘클릭 수’ 경쟁에 뛰어든다. ‘의미를 짚는 기사’가 아니라 ‘좋아요 많이 눌리는 기사’가 우선순위가 된 건 당연지사다. 예전 같았으면 취급도 안 했을 패션 브랜드를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가 악덕 착취기업으로 들통나는 바람에 덩달아 조롱받는 퇴물 언론이 된다.

#2. 우아하게 침몰하는 방법

영화의 얼개는 이렇다. 잘 나가는 뉴욕 정론지 기자에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앤디(앤 해서웨이)가 위기에 빠진 ‘런웨이’를 되살릴 구원투수로 낙점돼 영락한 미란다와 재회한다. 예상대로 20년 만의 첫 만남은 삐걱거렸지만,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쓴다. 특종 인터뷰를 따내 매체 신뢰도를 높이고, 외부 인수합병 리스크를 제거해내고, 제대로 취재할 편집권을 보장받는 등 결말까지 일련의 서사가 매끄럽게 흘러간다.

영화는 패션이건 미디어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이 인류를 대체해가는 시대에서 ‘오트쿠튀르’나 ‘특종 단독’ 같은 장인정신을 앞세운 전통적인 패션·미디어산업의 구조는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대신 디자인과 문장을 프롬프트가 대신 만들어내는 시대에서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태도로 대할지는 인간의 몫이란 점을 강조한다. 전편이 ‘세룰리안 블루’로 대표되는 컬러와 미적감각 등 대중이 잘 몰랐던 패션의 세계 그 자체를 보여주는 영화였다면, 속편은 ‘인간다움’의 가치를 되짚는 드라마로 이해하는 게 타당한 이유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에 나오는 사샤(루시 리우)와 벤지(저스틴 서로) 반즈 부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메타포다. 가치관 차이로 이혼한 두 사람은 문화적 자본을 내재화하는 인물, 그것을 외형적으로만 소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조정 위기설을 듣고 호들갑 떠는 앤디 앞에서도 묵묵히 당면한 업무에 매진하는 나이젤(스탠리 투치)과 권력을 누리기 위해 뒷배로 둘 부유한 후원자를 찾으려 애쓰는 에밀리(에밀리 블런트)의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눈에 들어온다.

#3. 칭챙총? 억측은 금물

패션보단 메시지에 중점을 뒀다고는 했지만, 근래 본 어떤 영화보다 ‘패셔너블’하다. 샤넬부터 디올, 마르지엘라, 브루넬로 쿠치넬리 같은 럭셔리 브랜드가 대거 등장한다. 세계적인 의상 디자이너 몰리 로저스가 담당한 주인공의 옷차림 역시 마찬가지다. 전설적인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의 스타일을 참고했다는 미란다의 의상은 독보적이다.

특히 걸을 때마다 세차게 흔들리는 태슬이 수없이 달린 재킷을 입고 나온 장면이 압권이다. 회사의 새 주인이 구조조정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을 맞이한 미란다의 심정이 태슬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앞서 중화권을 중심으로 제기된 인종차별 논란은 기우에 불과하다. 앤디의 비서로 등장하는 중국계 캐릭터 친저우(헬렌 셴)의 이름이 서구권에서 중국인을 비하하는 ‘칭챙총’과 유사하고, 캐릭터 역시 자신의 학력이나 속사포로 읊어대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희화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작 영화에서 친저우는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에 백인 중심의 뉴욕 패션업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고, 결국 승진까지 거머쥐는 진취적인 사회초년생으로 그려졌다. 과도한 억측은 금물. 119분.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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