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전선이 막 걷힌 대한민국에서 근로기준법이 태어났다. 잿더미 위에 세운 법이었다. 공장이 드물었고 근로자보다 농민이 많았던 나라에서, 입법자들은 일터의 최소한을 법으로 새겼다. 그 법이 지금도 살아 있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다. 알고리즘이 업무를 배정하고, 국경을 넘어 실시간으로 경쟁이 벌어지는 지금, 70년 전의 법률 언어로 21세기 일터를 규율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지난 70여 년간 한국 노동법은 시대적 파고에 맞춰 그 부피를 키워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집단적 노사관계의 자율성이 확보되었고, 1997년 외환위기는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제도화하며 노동유연성 담론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과거의 투쟁 문법이나 유연화 논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공장제 근로를 전제로 설계된 현행법 체계는, 급변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 기업의 경쟁력과 근로자의 안전성을 동시에 담아내기에 버거운 '작은 옷'이 되어가고 있다.
노동법이 정립해야할 새로운 숙제들
가장 먼저 직면한 과제는 근로자와 사용자 개념의 재정립이다. 전통적 노동법은 특정 사업장에서 사용자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받는 인적 종속성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AI 알고리즘이 업무를 배정하고 통제하는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이러한 이분법적 틀을 흔들고 있다. 배달 앱 하나가 수만 명의 이동 경로를 실시간으로 통제하지만, 그 관계가 '고용'인지 '위탁'인지를 법원이 판단하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운영함에 있어 법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리스크를 안게 되었고, 노무제공자는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종속성'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 변화된 고용 형태를 포괄하면서도 기업의 혁신 동력을 저해하지 않는 새로운 법적 기준을 모색해야 한다.
근로시간 규제의 경직성 또한 풀어야 할 숙제다. 주52시간제의 취지는 타당하나, '9 to 6'로 상징되는 획일적인 시간 관리는 현대 산업 구조와 맞지 않는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나 IT 산업 등에서 공장 근로자와 동일한 잣대로 연구개발 인력의 시간을 규제하는 것은 국가적 경쟁력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이미 지식 근로자에게 별도의 근로시간 예외를 두거나, 성과 기반의 자율적 시간 관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제를 정비해왔다. 기업의 성과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연한 근로시간 제도를 확립하되, 동시에 근로자의 건강권과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조화시키는 지혜가 요구된다. 근로시간의 유연화는 시작일 뿐이다. 채용·배치·전환 등 고용 전반에 걸친 유연성 없이는, 기업도 근로자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연성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일하는 방식이 유연해질수록, 일자리를 잃었을 때의 안전망도 촘촘해져야 한다. 그 해법으로 주목받는 것이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이다. 고용의 경직성을 유지하는 대신 일자리 이동 자체를 유연하게 허용하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득 공백과 재취업을 국가가 책임지는 방식이다.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이 모델을 통해 높은 노동 유연성과 강한 사회적 안전망을 동시에 구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사회적 신뢰와 재정 기반이 전제되어야 하는 만큼, 단순한 제도 이식이 아니라 한국적 맥락에 맞는 설계가 필요하다.
나아가 AI가 인사평가와 채용, 해고를 결정하는 ‘알고리즘 경영’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디지털 인권에 대한 논의를 노동법 체계 안으로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평가받는지를 알 수 없다면, 이의를 제기할 권리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경영권의 효율적 행사를 보장하면서도, 알고리즘의 판단 기준과 그 근거를 근로자가 확인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법제화해야 한다.
노동 방식의 변화...'법적 불확실성' 과제 해소해야
노동법은 오랫동안 보호의 언어로 쓰여왔다. 약자를 지키고, 강자를 제한하는 것이 이 법의 본령이었다. 그러나 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시대에는 보호의 대상도, 보호의 방식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플랫폼 위에서 일하는 사람도, 그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도 지금의 법 앞에서는 모두 불확실하다. 노무제공자는 보호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기업은 어디까지가 합법인지 알 수 없다. 법적 불확실성은 노사 모두의 적이다.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안심하고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은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킨다. 예측 가능하고 공정한 규칙이 그 토대다. 공정한 규칙 위에서 기업이 성장할 때, 그 과실은 근로자에게도 돌아온다. 노동법이 지켜야 할 것은 바로 그 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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