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등산로서 일그러진 ‘번따’… “싫다는데 계속하면 범죄”

2 hours ago 2

[위클리 리포트] 유럽 ‘캣 콜링’ 엄벌, 한국은?
번화가 넘어 뷰티숍 등으로 확산
거절하면 폭언-폭행, 안전 위협… 외국인 노린 ‘홍대 가이’ 조롱도
비접촉 성희롱, 소액 벌금 불과
‘사냥’ 아닌 존중 담긴 소통 필요… 거절 앞에선 멈추는 상식 절실

⟪싫다는데도… 일그러진 헌팅 문화

“번호 좀 주세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이른바 ‘헌팅’이 위협으로 변질되고 있다. 서점, 헬스장, 등산로에서까지 헌팅이 이어지면서 ‘거절은 거절’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더 확산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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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유모 씨(25)는 최근 한강 인근에서 친구와 라면을 먹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낯선 남성이 다가오더니 “마음에 든다”며 집요하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 거절해도 상대는 계속 “남자 친구가 있어서 그러냐”며 물러서지 않았고, 보다 못한 친구가 만류하자 “왜 그리 비싸게 구냐”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유 씨는 큰 싸움으로 번질까 봐 먹던 라면도 남기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유 씨는 “좋게 거절했는데도 상대가 도리어 화를 내니 당황스럽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헌팅’은 어제오늘의 문화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형서점이나 화장품 가게가 이른바 ‘번따’(번호 따기) 명소로 공유되는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확산하면서 과연 어디까지를 ‘용기’로 볼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거절 의사를 밝힌 상대를 향한 폭언과 폭행이 잇따르고, 외국인 여성에게 무리하게 치근대는 행태가 국가적 오명으로 번지면서 ‘적절한 관심 표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똑똑한 사람 만나려 서점 헌팅”… ‘번따’ 성지 정리도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몰입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교보문고는 대형서점 등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이른바 ‘서점 번따(번호 따기)’가 유행하면서 불편을 호소하는 손님도 늘자 모든 지점에 이런 안내문을 붙였다. 이다겸 기자 gyeom@donga.com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몰입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교보문고는 대형서점 등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이른바 ‘서점 번따(번호 따기)’가 유행하면서 불편을 호소하는 손님도 늘자 모든 지점에 이런 안내문을 붙였다. 이다겸 기자 gyeom@donga.com
과거 길거리에서 주로 이뤄지던 헌팅은 최근 뜻밖의 장소로 퍼지고 있다. 대형서점이 대표적이다. “지적인 여성을 만나려면 서점에서 번호를 물어보면 된다”란 이야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퍼지며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에서 이성에게 번호를 묻는 행동이 놀이처럼 유행했다. 지난달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헌팅을 시도했다는 회사원 김모 씨(33)는 “클럽 등보다 지적인 여성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그럴듯해서 시도해 봤다”며 “(헌팅을 위해) 원래 관심이 없던 소설 코너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일 유튜브와 SNS에서 ‘교보문고 번따’ 등을 검색해 보니 서점에서 헌팅을 시도하는 글이 여러 건 나타났다. 대형서점들은 이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교보문고는 지난달 광화문점 매장 곳곳에 ‘다른 사람의 몰입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취지의 안내문을 붙인 데 이어 이달 이를 전 매장에 확대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헌팅으로) 불편을 겪는 고객이 있으면 매장 직원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안내하라고 지시도 내렸다”고 말했다.

다만 현장에선 여전히 곤란을 호소한다. 지난달 27일 한 대형서점 직원은 “안내문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손님을 여전히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보는 것 같다”며 “먼저 제지하기도 어려워서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올리브영 등 화장품 가게나 자라 등 SPA 브랜드 매장을 번따 명소로 공유하는 글까지 돌고 있다. 외모와 패션에 관심이 많으면서 크게 사치하지 않는 이성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자연스레 사진까지 찍어 달라고 할 수 있다며 팝업 스토어를 추천하는 글도 있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다 보니 가벼운 만남부터 선호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상대의 공간을 존중하지 않는 헌팅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홍대 가이’ 멸칭 유행… 외국인 대상 성범죄 증가

문제는 상대가 뜻대로 헌팅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태도를 바꿔 여성을 위협하는 사례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말이 상대적으로 서툰 외국인 여성에게 무리하게 접근해 연락처를 묻거나 동석을 요구하는 이른바 ‘홍대 가이(Hongdae guy)’ 논란도 심각하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서울 마포구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외국인 여성을 발견하면 “혼자 왔느냐” “(성적으로) 오픈 마인드(열린 자세)냐”며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식이다. 이들의 모습은 온라인에서 급속히 퍼져 미국의 유명 커뮤니티 ‘레딧’ 등에서도 ‘한국 여행 시 주의할 점’ 등의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됐다. 실제 피해 사례도 잇따른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멕시코인 여성 알렉스 씨(31)는 마포구 연남동의 한 주점에서 “같이 마시자”며 들러붙는 한국인 남성 일행을 떼어내느라 곤욕을 치렀다. 알렉스 씨는 “계속 거절했지만 물러나기는커녕 내 손목을 잡아끌기도 했다”며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공포를 호소했다. 러시아인 소피샤 씨(23)는 “한 남성이 헬스장에서 쳐다보더니 ‘자기 집으로 가자’며 10분 넘게 따라왔다”며 “일부 한국 남성은 ‘외국 여성에겐 쉽게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만 출신의 한 유튜버는 지난해 홍대 거리에서 남성의 헌팅을 거절했다가 폭행당해 손가락이 골절됐다는 영상을 올렸다.

외국인 성범죄 피해도 늘어나는 추세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광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외국인 대상 성범죄는 2021년 724건에서 2024년 1237건으로 70.9% 늘었다. 헌팅을 가장한 위력 행사가 범죄 수치로 나타나는 셈이다.

외국인 여성을 향한 과도한 헌팅 시도는 일본에서도 문제가 됐다. 오사카 번화가 등지에서 일본인 여성에게 서툰 일본어로 ‘잇쇼니 오사케 노무카’(같이 술 마실래)라며 말을 거는 한국인 남성이 늘자 현지에서 “일본인 여성이 만만해 보이냐”는 반감이 생긴 것. 2023년 태국에서는 한국인 유튜버가 지나가던 여성에게 “함께 술을 마시자”며 추태를 보이는 모습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자 주태국 한국대사관이 “국격을 훼손시키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관광지의 경험은 지역을 넘어 그 나라 전반에 대한 이미지로 남는다”며 “과도한 접근이 발생하면 주변 사람이 제지하는 등 개인의 양심과 시민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 유럽에선 공공장소 성희롱 엄벌

공공장소에서의 무분별한 헌팅은 한국 여성에게도 보편적 위협이다. 지난달 경기 부천시 원미산에서는 등산하던 30대 여성들에게 일면식도 없는 노인이 다가와 “아이고 예뻐라, 애인해도 되겠어”라며 추파를 던진 영상이 공개돼 공분을 샀다. 누리꾼은 “이런 이들 때문에 여성들이 마음 놓고 취미 생활도 못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문제는 처벌의 실효성이다. 현재 국내법상 비접촉 성희롱은 경범죄처벌법상 ‘지속적 괴롭힘’ 등으로 다루지만, 입증이 어렵고 10만 원 이하 벌금에 그친다. 2020년 지하철역에서 여성들을 향해 반복해서 음담패설을 내뱉은 남성도 벌금 10만 원을 무는 데 그쳤다.

반면 유럽 선진국은 일찌감치 ‘캣 콜링’을 심각한 범죄로 보고 처벌을 강화해 왔다. 캣 콜링은 이성에게 휘파람을 불면서 성희롱하거나 길을 막는 행위를 이른다. 프랑스에선 캣 콜링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2018년 관련 벌금을 최대 750유로(약 130만 원)로 올렸다. 영국은 2022년 캣 콜링에 대한 최대 징역형을 기존 6개월에서 2년으로 늘렸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도 처벌 기준을 마련해 엄벌하고 있다. 성폭력 전문 심지연 변호사는 “국내에선 여전히 접촉성 성범죄를 단속하는 데 급급하고, 성희롱 등 모욕성 발언에 대한 처벌은 약한 게 현실”이라며 “언어적 성폭력과 위협적인 접근에 대해 좀 더 명확한 형사적 제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No’는 ‘No’로 인식해야… “거절하는데 계속하면 공포”

하지만 법적 처벌 이전에 더 시급한 것은 ‘허용되는 호감 표현’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지적도 나온다. 호감 표현은 상대가 나의 접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상호작용’이지, 나의 욕망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사냥’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사회적 기준이 제안된다. 첫째는 ‘아닌 건 아닌 것(No means no)’이라는 절대 원칙이다. 상대가 단 한 번이라도 거절 의사를 밝히거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즉시 물러나는 것이다. 둘째는 ‘장소의 적절성’이다. 서점, 도서관, 헬스장 등 개인이 무언가에 몰입해야 하는 공간에서의 집요한 접근은 결코 용기로 포장될 수 없고, 사생활 침해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셋째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태도’다. 원미산 사례처럼 나이 차이가 크거나 상대가 위압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호감을 앞세우는 것은 공포를 주는 행위임을 자각하자는 얘기다.

어떤 종류의 대화든 상대가 준비됐는지 살피는 데서 시작하고 평온을 깨지 않아야 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조언이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본다면 당연히 거절할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며 “거절에 분노하거나 집요하게 매달리는 행위가 ‘열정’으로 포장되는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이다겸 기자 gye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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