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미생'을 위한 롤모델, 윤태호가 '인간 유일한'을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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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1층에 있는 '유일한 기념관'에서 유일한 박사를 바라보고 있는 윤태호 작가. ⓒ 윤태호/SUPERCOMIX STUDIO Corp. 유한양행 제공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1층에 있는 '유일한 기념관'에서 유일한 박사를 바라보고 있는 윤태호 작가. ⓒ 윤태호/SUPERCOMIX STUDIO Corp. 유한양행 제공

“여기 가장 엄혹한 시절에 가장 근대적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유일한입니다. 그의 삶을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창작 웹툰 <NEW 일한>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드라마 투자를 결정하는 피칭 현장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대신 ‘시대를 잇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박사를 내세우는 장면이다. 웹툰을 그린 윤태호 작가는 지난 15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왜 존경하는 인물을 항상 멀리서 찾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보다 가까운 시대여도 치열하게 살아낸 인물이라면 삶의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 예술이 영웅을 다루는 오랜 습관이 있다. 영웅을 찾기 위해 늘 수백 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근현대 인물들은 대체로 선택받지 못하고 이야기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유는 간명하다. 피부에 와닿지 않을 만큼 시간적 거리가 멀어야 서사가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영웅은 멀수록 좋아요. 우리가 마음껏 은유해도 된다는 소리거든요.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만 해도 영웅과 관련한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을 수도 있고, 왜곡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부담이 없을 수가 없는 거죠.”

윤 작가가 ‘서사적 리스크’를 기꺼이 짊어지기로 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유한양행이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창업주인 유 박사의 정신과 업적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실제 사건이나 역사를 다룬 적은 있어도 실존 인물을 이야기 중심에 둔 적은 없었던 데다, 유 박사가 1971년 작고한 ‘현대인’이라는 점에서 적잖은 부담이 있었지만, 도전을 택했다. 윤 작가는 “유 박사는 잘은 몰라도 언제나 들어봤던 분이었고 회사 역시 버드나무 마크나 안티푸라민 같은 제품으로 친숙해 참여를 결정했다”며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너무나 탐났던 분”이라고 했다.

윤태호 작가의 'NEW 일한' 속에 그려진 유일한 박사의 모습. ⓒ 윤태호/SUPERCOMIX STUDIO Corp

윤태호 작가의 'NEW 일한' 속에 그려진 유일한 박사의 모습. ⓒ 윤태호/SUPERCOMIX STUDIO Corp

윤 작가의 말처럼 유일한 박사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인물은 드물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아홉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 식품 기업을 일궈 자수성가한 그는 조국에 돌아와 열악한 위생환경과 기아에 시달리는 동포를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50대 나이에 일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비밀첩보작전에 참여하려 특수부대 훈련을 받기도 했다. 교육·장학 사업에 매진하다 재벌로 남길 포기하고 회사와 재산을 가족에 넘기는 대신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윤 작가가 파고든 지점은 잘 알려진 유 박사의 화려한 이력 너머에 있는 ‘인간 유일한의 선명성’이었다. 윤 작가는 “유 박사는 당시는 물론 지금으로 봐도 ‘찐 엘리트’인 만큼, 작정했다면 얼마나 상류의 삶을 살 수 있었겠느냐”라며 “아예 나라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애국심이라는 것이 그의 평생을 지배할 수 있었는가가 궁금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인의 멋진 가치관을 통해 완성도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구현해내는 것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윤 작가는 호기롭게 시작한 작업을 “지옥 같았다”고 표현했다. 유 박사는 자타공인 성공한 사람이라면 으레 한 권쯤 쓴다는 흔한 자서전 하나 남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윤 작가는 “유 박사가 직접 내면의 생각을 공개한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 전기를 수없이 반복해 읽으며 유 박사가 내린 결정들의 ‘동기’를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웹툰 'NEW 일한'. 유한양행 제공

웹툰 'NEW 일한'. 유한양행 제공

8회라는 한정된 분량 속에서 그의 삶을 풀어내기 위해 콘텐츠 제작사가 드라마 투자를 받기 위해 프레젠테이션하는 포맷을 펼친 이유다. 윤 작가는 “전기를 읽어보면 우리나라에 이런 기업가가 있었나 싶은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면서도 “유일한이라는 인물의 생각을 억지로 그려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참 고심하다 ‘아예 나처럼 모르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자’고 했다”며 “우리 시대의 영웅을 아까워하면서도 피상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입장으로 그려내고자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일 웹툰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연재를 시작한 <NEW 일한>은 지난 18일 8화로 연재를 마무리했다. 댓글에는 독자들의 호평이 적잖이 달리고 있다. 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일형이란 이름을 일한(一韓)으로 개명한 이야기나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게 유한동산에 울타리를 치지 말라고 했던 유언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을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정부가 바로 피치자(被治者)로부터 나오는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라고 앞서 말했던 선구자적 정신이 드러나는 대목은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이야기는 인공지능(AI)의 대두, 기후위기와 국제정세의 불안 등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박사의 삶이 어떤 이정표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윤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유일한 박사가 살았던 때를 뛰어넘는 불확실성이 있을까요. 내가 불안하면 세상은 불안한 겁니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경영해야 하는 시대가 왔어요.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유 박사가 있어요. 그가 많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인물이면 좋겠어요.”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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