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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의 ‘사람들’(1995). 인물을 드러내지 않고 인물을 드러낸 ‘사람’ 연작 중 한 점이다. 형상의 표현보다는 먹붓의 활력이 압도한다. 1970년대 이후 화백은 줄곧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몰두하며 점과 선, 크기와 굵기, 농담을 가진 필법 아래 간결하고 함축적인 사람의 모습 또는 군상의 움직임을 그려냈다. 색을 넣은 것보다 더 강렬한 검은 선묘로 사람의 몸이 취하는 자세의 변화상을 일관되게 실험했고 한국화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종이에 먹, 233×14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정하윤 미술평론가] 전통을 지키면서도 전통을 깬 사람. 그 손끝에는 전통의 맥과 현대적 실험 정신이 녹아 있다. ‘이 시대 마지막 문인’이라 불린 그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과감하게 변화를 추구해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산정 서세옥(1929∼2020)이다.
서세옥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사람’ 시리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 연작은 제목 그대로 ‘사람’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다룬다. 하지만 보통의 인물화를 떠올리면 안 된다. 서세옥은 눈, 코, 입, 머리카락 같은 인간의 세세한 외형은 모두 생략하고 본질과 뼈대만을 남겼다. 선 몇 개로만 그린, 아주 단순한, 말하자면 고도로 추상화한 사람의 모습이다.
서세옥의 그림에서 사람은 홀로 있기도 하지만 주로 여럿이 함께 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동그라미나 퍼즐 모양으로 단순화했지만, 보는 이는 안다.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동무를 한 모습임을. 표정도, 개별적인 특징도 없지만 그 안에는 연대와 교감의 기운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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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의 ‘사람들’(1989). 극도로 압축한 선만으로 군중의 움직임과 형태를 포착했다. 작품 속 사람들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이라기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라는 게 맞다. 붓 한 획의 절묘한 필치로 간략하게 표현한 인물들, 그들을 둘러싼 여백을 통해 의미를 집약한 독특한 화풍은 점차 서체적인 세계로 향해 갔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한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 나왔다. 종이에 먹, 164×26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그런데 서세옥은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인간을 표현했을까. 이에 대해 화백은 “국경이나 종족 따위를 초월해 버리는 인류라는 의미의 우리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럿이 모여 있는 이유는 뭘까. 역시 화백은 “즐겁거나 슬프거나 무리지어 있거나 외톨박이거나 할 것 없이 한 탯줄이고 많이 가진 사람, 굶주린 사람 모두 가족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외형을 덜어내고 여러 인물을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은 피부색이나 눈동자색, 경제적 격차나 사회적 지위 같은 가시적·인위적 차이를 지워버리고, 인류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믿음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래서 서세옥의 ‘사람’ 시리즈는 그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화면에 남은 선과 형상은 최소한이지만 그 뒤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화합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대상 없는 수묵추상…한국화에 없던 장르
흔히 추상화를 보고 “작가가 그림을 제대로 그릴 줄 모르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세옥은 그림의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온 인물이었다. 서울대 한국화과 1회 졸업생이었고 대학 4학년 때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국무총리상(‘꽃장수’ 1949)을, 제3회 대회에서는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서울대 한국화과 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1959년 서른 살의 서세옥은 파격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점의 변주’(1959)다. 이전까지 한국화에서 본 적 없는 형식이었다. 산수화도, 새와 꽃을 그린 화조화도, 인물화나 풍속화도 아니었다. 궁중화도 민화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구체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 추상화였다. 당시 한국화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장르였다.
전통적으로 한국화는 산이나 강, 꽃이나 새, 인물이나 장면 등 구체적인 대상을 다뤄왔다.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았고 닮게 그리는 것이 목표도 아니었지만, 대나무든 국화든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은 반드시 있었다. 그러나 서세옥은 이런 오랜 관습을 과감히 깨뜨렸다. 먹으로 점만 찍은 것이다. 그 크기와 번짐, 먹의 짙고 옅음을 달리하며 여러 번 찍었다. 제목 그대로 ‘점의 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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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의 ‘점의 변주’(1959). ‘사람’ 연작이 시작되기 이전의 작업이다. 먹의 농담 변화를 이용해 묵점으로만 화면을 꾸렸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수묵담채의 문인화 양식으로 대상을 간결하게 묘사한 시기를 거친 뒤 점·선 등으로 주제를 집약하며 추상으로서 한국화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줬다. 닥지에 먹, 95×73.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 작품이 미친 충격은 상당했다. 보수적인 동양화단, 그것도 주류 미술계 한복판에서 젊은 작가가 이토록 혁신적인 시도를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용기였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한국화를 그렸다는 이 용기가 바로 서세옥을 미술사에 길이 남는 독보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혁신적인 방식이다. ‘점의 변주’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전통 동양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점을 찍는 방식에 따라 ‘준법’이라 불리는 기법들이 발전했고, 특정 준법은 한 화파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했다. 점을 어떻게 찍느냐가 그림의 완성도를 좌우했다. 서세옥은 이 점에 주목해 한국화의 본질을 꿰뚫었고 그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냈다. 겉보기에는 전통을 깨뜨린 듯하지만 실은 한국화의 본질을 꿰뚫은 결과였다.
서세옥은 왜 그토록 변화를 갈망했을까. 주류 미술계의 중심에 일찌감치 안착한 이력을 보면 오히려 보수적인 길을 걸을 법도 한데 말이다.
1929년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독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학은 약속된 기호인 문자라는 틀 안에 갇혀 결코 그 밖으로 풀려나갈 수 없다는,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와 달리 그에게 자유를 안겨준 것은 그림이었다. 이 때문에 서세옥은 문학가가 아니라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자유’가 서세옥에게 왜 중요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였고,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나라를 잃고 억압받는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서세옥이 자유의 소중함과 그에 대한 갈망을 깊이 새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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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의 ‘두 사람’(2004).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두 사람이 군상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정적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화백의 ‘사람’은 인간에 대한 관조·명상을 통해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에 귀의해가는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 닥지에 먹, 39.8×4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도 기존 한국화 방식으로는 원하는 만큼의 자유와 해방감을 충족하기 어려웠다. 전통적으로 한국화 교육은 스승이나 중국 화가의 그림을 똑같이 베껴 그리는 ‘전이모사’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붓 운용과 표현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이런 틀 속에서 서세옥은 “전이모사에서 벗어나자, 변화하자, 껍데기를 깨자, 실험하자”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전통이라는 굴레로부터 한국화를 해방시키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의지가 구체적으로 구현된 방법이 바로 ‘점의 변주’에서 드러나는, 본질에 집중한 변화였다.
‘사람’ 시리즈나 ‘점의 변주’를 보면 쉽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붓을 들고 그리는 행위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떠올리고 실제로 실행하며 그 안에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는 일. 이 모두는 하나도 쉽지 않다.
독보적 자리에서도 “난 그림이란 수렁에 빠져 허우적…”
생각해 보자.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라는 장르만 존재하던 1959년에 몇 개의 점만으로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없던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수적인 스승과 선배들 앞에 점 몇 개 찍은 그림을 ‘작품’이라 내놓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잘못하면 그동안 쌓아온 경력에 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의 확신과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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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서울 성북동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서세옥 화백. 2015∼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증작품 특별전으로 연 ‘서세옥’ 전에 걸린 다큐멘터리 영상 중 한 장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도 보수적인 진영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 서세옥. 그는 한국화를 현대화한 공로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지만 스스로는 “그림이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타계 전인 2014년,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대표작 10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2020년 타계 후 유족은 주요 작품과 소장품 3300여 점을 성북구립미술관에 내놓았다. 서세옥이 50년 넘게 살아온 서울 성북구에는 머지않아 구립 서세옥미술관이 들어선다(2028년 개관). 그의 걸작뿐만 아니라 그의 값진 유산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는 태도가 바로 서세옥이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