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가가 탐냈던 요충지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 새로운 승자들이 앞다퉈 이 섬을 점령했다. 새로운 정복자들이 앞선 시대의 흔적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았던 걸까. 시대를 거듭하며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문명들은 시칠리아만의 고유 미학을 완성했다. 수많은 침략과 재난을 묵묵히 견뎌낸 이 섬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주도(州都)인 팔레르모는 제주도의 14배 크기에 달하는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의 심장이다. 중심 거리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괴테가 왜 "거리를 대충 파악하는 것은 쉬우나, 완전히 정통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차들은 신호를 무시한 채 과속으로 달리고, 슬럼화된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빨래가 펄럭인다. 번잡함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메인 도로 4개가 만나는 사거리, '콰트로 칸티'가 나타난다. 영화, 드라마 배경으로 접했던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인파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마시모 극장(테아트로 마시모)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대부 3>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기도 이곳은 그리스 코린트식 기둥으로 세워진 웅장한 외관이 압도적이다. 세월의 때가 탄 빛바랜 표면에 잠시 아쉬움이 스치다가도, 주변의 이국적인 야자수와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대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파리, 비엔나(빈) 오페라 하우스 다음으로 유럽에서 셋째로 큰 오페라 극장이다. 비록 시즌이 맞지 않아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극장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아쉬움은 경탄으로 바뀐다. 고개를 들면 붉은빛과 금빛으로 찬란한 천장, 그리고 벽화 <음악의 승리>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벽면을 장식한 무라노 유리 샹들리에는 객석마저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절정의 기교가 필요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카스타 디바(Casta Diva)'가 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면 어떨까. 호흡이 긴 우아한 선율에 순간 숨이 멎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에 잠기게 된다.
시칠리아 미학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노르만 궁전도 야자수 사이 중후한 모습을 드러낸다. 회백색 돌로 둘러싸인 단정한 르네상스풍 마케다 중정. 군더더기 없는 아치로 담백한 공간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루지에로 방에서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황금빛 모자이크가 쏟아진다. 팔라티나 예배당은 궁전 내부의 작지만 밀도 높은 공간이다. 9세기 아랍 궁전 자리에 12세기 노르만이 다시 세웠고, 아랍풍 잔재 위로 중세의 엄격함이 덮여 있다. 역사적 사실과 시각적 요소가 연결될 때, 정신없는 혼재는 그제야 '융합'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팔레르모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도시 몬레알레. 벽면이 성서 이야기로 빼곡한 이곳의 대성당 내부 역시 황금 모자이크로 뒤덮여 있다. 마치 커다란 보석 상자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클로이스터는 쌍을 이룬 얇은 기둥이 늘어서서 회랑을 이룬다. 아랍식 기둥은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고, 기둥머리에는 동물, 꽃, 식물이 새겨져 있다. 정원을 둘러싼 회랑을 천천히 걷다 보면 시칠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혼재를 읽어내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어떻게든 맥락을 만들어 기억해 보려 하지만, 이 섬의 복잡한 역사는 하루아침에 소화하기 쉽지 않다. 발길을 옮긴 곳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식민도시였던 아그리젠토다. 신전의 계곡부터 콩코르디아 신전까지 걸으며, 약 2500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석회암들을 마주했다. 인간이 가진 시간의 유한함에 괜히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비와 흐린 날씨는 이 오랜 돌들에 묵직한 기운을 더한다. 석양을 뒤로하고 다홍빛 조명이 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신전 안에서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연극으로 펼쳐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흐린 날 아그리젠토의 여운을 안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내륙으로 향하니 다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쬔다. 피아차 아르메리나 외곽, 옛 철도 건물에 위치한 레스토랑 엘 포게르(Al Fogher). 인적 없는 집을 탐색하듯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셰프가 반갑게 맞이하는데, 안젤로 트레노 셰프의 아들인 듯하다.
공간에 놓인 접시만 봐도 레스토랑을 관통하는 감각이 어느 정도 읽힌다. 여느 파인 다이닝처럼 접객을 하는 매니저가 없음에도 요리가 기대됐던 이유다. 메뉴판도 문학적이다. 고등어 직화에 성게와 푸아그라를 올린 ‘노인과 바다’, 라이스페이퍼 위의 ‘천사의 달걀’. 팔레르모에서 농도 짙은 파스타와 통조림 같은 해산물에 실망했었던 터라, 이 내륙의 상큼하고 섬세한 뉘앙스가 더욱 반갑게 다가온다.
레스토랑 인근에는 4세기 로마 귀족의 대저택인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가 자리하고 있다. 수십 개의 방과 냉·온탕, 체육관, 교회까지 갖춘 호화로운 규모다. 이곳의 압권은 바닥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화다. 12세기에 발생한 산사태로 약 700년간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원형 거의 그대로 발굴됐다.
그 덕에 생생한 사냥 같은 일상 장면부터 신화, 기하학 무늬 등이 대리석 조각으로 완벽하게 표현돼 있다. 특히 비키니 스타일의 운동복을 입고 공을 던지는 여성들을 그린 ‘비키니 소녀들’이 유명한데, 그림 속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이 오늘날 우리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 낯설지 않다. 바닥에 거대한 그림책처럼 펼쳐진 대리석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니, 2000년 전 그들의 활기찬 일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문득 어린 시절 색종이를 뜯어 모자이크 숙제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히 잡지 사진을 활용할 때면, 원래의 이미지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찢기고 다시 새로운 패턴으로 결합하며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무척 신기했었다. 고작 종이를 뜯어 붙이는 데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이 광활한 대저택의 바닥을 대리석 조각으로 메운 장인들의 고된 노동을 생각하니 괜히 어깨가 결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인들이 고통스럽게 새겨 넣은 그 대리석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200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그들과 조우하고 있다.
<표범>(Il Gattopardo)은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로 꼽힌다.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는 자신의 증조부를 주인공의 모델로 삼아,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 시기에 몰락하는 귀족의 이야기를 썼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 소설의 역설은 AI라는 새 문명과 조우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살아온 방식을 과감히 바꾸고, 기계가 복제할 수 없는 이야기를 써야만 살아남는다. 수천 년의 세월을 뚫고 살아남은 시칠리아의 모자이크 조각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기록하는 오늘은 수천 년 뒤 어떤 이야기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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