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과 무당, 당신은 누구의 예언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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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예술가 켄트리지의 공연 ‘시빌’

글자가 빼곡한 종이들이 무대 위 낙엽처럼 흩날린다. 배우가 종이 낱장 하나를 집어 귀에 대자 의미심장한 소리가 들리지만 종이를 떼면 소리는 끊어지고, 다른 종이를 들면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린다. 종이마다 적힌 것은 고대 그리스의 무당 ‘시빌’이 사람들의 질문을 듣고 써서 던져 놓은 점괘다.

문제는 쌓여 있던 점괘들이 어느 날 세찬 바람에 날려 흐트러져 버렸다는 것. 수북하게 쌓인 종이 더미를 다급하게 뒤지며 ‘내 점괘’를 찾으려는 군상 속에서 극은 묻는다. ‘우리는 미래와 운명을 예측할 수 있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공연 작품 ‘시빌’이 한국 무대에 올랐다. 9~10일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이 공연은 운명을 알고 싶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과 불안을 드로잉을 담은 영상과 애니메이션, 음악, 연기, 무용으로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과학기술과 알고리즘까지 소재로 다뤘다.

켄트리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남아공의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의 잔재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다. 총 2막으로 구성된 이번 공연에서도 1막 ‘그 순간은 흩어져 버렸다’에서 남아공의 탄광 속 광부와 그림을 그리는 켄트리지의 모습이 교차했다.

극에서는 무대 위 연기자들이 입으로 내는 리드미컬한 소리와 광부의 곡괭이 소리가 겹쳤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이야기를 짓는’ 예술가와 ‘광물을 캐는’ 광부의 노동을 비교하게 되는데, 켄트리지는 이렇게 설명했다.

“광산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를 두 가지 풍경으로 나눈다. 하나는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화려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도시의 모습. 사람들은 광부를 불법 노동자라고 하지만 예술가와 광부 중 과연 어느 쪽이 불법인 것인지, 그 질문을 거칠게 담았다.”

이어지는 2막 ‘시빌을 기다리며’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언’과의 쫓고 쫓기는 싸움을 세련된 감각으로 무대에 펼쳐 놓는다. 켄트리지와 협력해 작품을 연출한 작곡가 은란라 말랑구의 힘이 넘치는 음악과 연기자들의 몸짓이 알렉산더 칼더의 드로잉을 연상케 하는 색채와 선을 만나 정제된 모습으로 전개된다.그중에서도 스크린으로 투사된 책 영상 위로 역동적인 춤을 추는 ‘시빌’의 그림자가 겹치는 장면이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빅데이터’를 상징하는 듯한 깨알 같은 글씨들은 무대 위 살아있는 몸으로 등장한 무녀 ‘시빌’의 그림자에 가려 힘을 잃는다. 켄트리지는 “우리는 은행 대출을 받는 게 좋을지, 80세까지 살 수 있을지, 미래와 건강은 어떨지 알고리즘에게 예측해달라며 신봉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시빌’의 가능성을 붙들기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했다.

켄트리지는 30일 GS아트센터에서 또 다른 작품을 이어간다. 이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한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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