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전세계 안보는 물론 에너지 지형도를 바꿔놓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미국 에너지부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던 그의 유산이 7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이례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AI)발 에너지 수요 급증, 지구온난화로 인한 무탄소 에너지 필요성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 원자력 발전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손자 찰스 오펜하이머가 미국내 원자력 발전 르네상스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20년이 넘는 실리콘밸리 커리어를 거쳐 최근 원전 디벨로퍼 스타트업을 창업한 그를 매일경제가 만나 미국 원전 시장의 분위기와, 한국의 원전 경쟁력 등에 대해 들어봤다.
韓 원전 역량 세계 최고 수준
-한국을 방문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국의 원전 기자재 및 인프라 기업들, 그리고 투자자들을 만났다고 전해 들었는데요.
=네, 한국의 원전 네트워크에 있는 지인들 덕분에 오게 됐습니다. 지금은 특히 원전 투자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미국 내에서 원자력 에너지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여기에 한국의 전문성과 투자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아주 큰 기회가 열려 있거든요. 미국에서 이 프로젝트들을 실제로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이른바 ‘팀 코리아’가 미국 시장에 빠르게 들어가줘야 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구체적인 기회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 원전 밸류체인의 다른 이해관계자들도 한국을 많이 방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한국이 원전 분야에서 아마도 세계 최고의 평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끔은 한국 분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강력한 평판을 가졌는지 잘 모르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셔야 합니다. 한국의 평판이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한국은 원전 건설 비용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승시키지 않고) 오히려 낮춘 유일한 서구권 국가입니다. 원전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인지하고 “한국은 도대체 어떻게 저걸 해낸 거지?”라고 반문합니다. 둘째로 매우 중요한 점은,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출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원전 수출을 성공시킨 국가는 한국 외에 거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한국은 원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있어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리더입니다. 미국은 원전 프로젝트가 절실히 필요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이 필요합니다.
-한국 원전 산업의 전문성과 강점을 세부적으로 나눈다면 프로젝트 파인낸싱(PF), 사업 관리, EPC(설계·조달·시공), 혹은 기자재 공급 중 어느 쪽이라고 보십니까?
=흥미롭게도 그 전부에 해당합니다. 원전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때, 예산 안에서 끝냈는가’입니다. UAE 바라카 프로젝트가 왜 예정된 공기와 예산대로 끝날 수 있었을까요? 한국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의 자구나 변호사들의 논리 때문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그룹을 조율하고 헌신하여 실제로 결과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기술적 역량도 뛰어납니다. 한국의 공급망은 대형 원전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로 압력용기(RPV)는 아직 미국에서 직접 만들기 어려워 한국에 의존해야 하며, 일부 증기 터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촘촘하고 몰입도 높은 공급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 가지 핵심입니다.
정부 ‘제발 지어주세요’ 부탁에도 美 원전 프로젝트 ‘0’인 이유
-대표님이 이끌고 있는 ‘오펜하이머 에너지 벤처스’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원전 밸류체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나요?
=미국 시장 관점에서 걸림돌은 ‘재무적 리스크’와 ‘프로젝트 관리 리스크’입니다. 원전 프로젝트의 투자자와 구매자(전통적으로는 유틸리티・전력회사)들은 원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돈을 대고 모든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데, 프로젝트가 잘못되면 우리 회사는 파산한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프로젝트 구매 자체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저희는 전력회사가 프로젝트의 유일한 구매자나 위험 부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같은 ‘개발사’가 프로젝트를 우선 시작한 뒤, 전문가들인 한국의 투자자, EPC 기업, 그리고 테크 기업(수요자)과 전력회사를 모두 모아 오직 해당 프로젝트 개발만을 위한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하나의 법인 안에 리스크를 격리하고 분산시키는 모델을 ‘원전 디벨로퍼 모델’이라고 부르며, 저희가 집중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저희는 작은 회사이지만 원전 디벨로퍼로서, 가장 위험한 초기 단계를 수행합니다. 이제 많은 사람이 태양광 디벨로퍼나 부동산 디벨로퍼가 있듯이 ‘원전 디벨로퍼’도 있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원전은 늘 정부 주도의 느린 영역이었죠. 따라서 더 많은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며, 그것이 저희가 스타트업으로서 프로젝트를 개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독자들에게 한국의 전력 시장과 미국의 전력 시장 간의 차이점을 좀 더 설명해 드려야 할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 한전(KEPCO)이 유일한 단일 주체입니다. 의사결정권자와 자금 조달 주체가 딱 하나인 셈이죠. 그리고 전력 가격이 고정돼 있어 어떻게 보면 프로젝트의 매출이 보장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다릅니다. 전력회사들이 대부분 민간 기업들이니까요.
=그렇습니다. 한국의 모델은 중국이나 프랑스 모델과 유사합니다. 정부가 결정을 내리면 다른 기업들이 집행하는 구조죠. 원전 산업에는 그것이 아마 최고의 모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미국은 철저히 시장과 비즈니스 중심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전력회사들은 전력을 생산해야 한다는 정부의 압박을 어느 정도 받긴 하겠지만, 이익이 나지 않는 프로젝트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주주들에게 먼저 답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미국 시장에는 엄청난 양의 정부 인센티브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표현하자면 정부가 미국 전력회사들에게 “제발 원전 좀 지어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입니다. 투자비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는 50%의 투자세액공제(ITC)를 내걸었고, 전력회사들을 위해 3000억 달러(약 400조 원) 규모의 대출 보증도 마련했습니다.
저는 바이든과 트럼프 두 행정부에 걸쳐 정부와 협력해 왔는데, 정부 관료들이 전력회사들을 찾아가 “제발 원전 좀 지어주세요. 비용의 절반은 우리가 대겠습니다”라고 빌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력회사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월스트리트가 우리 주가를 떨어뜨릴 것이고, 프로젝트에 최종 비용이 얼마나 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추진되는 프로젝트가 전무한 반면, 한국은 몇 개가 있고 중국은 50개나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韓, 자체 노형 APR1400 고집 보다 美 시장 진출 속도가 중요
-현재 미국에서 진행 중인 구체적인 프로젝트 내용을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해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안전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4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습니다. 그 이후 미국 시장의 분위기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대통령의 4개 행정명령 중 저는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10개의 새로운 대형 원전 건설을 의무화한 명령’입니다. 저희는 ‘FOAK(최초 호기)’가 아닌 ‘NOAK(n번째 호기, 반복 건설)’ 프로젝트에 집중합니다. 원전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새로운 SMR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프로젝트를 ‘반복’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부 역시 이러한 대형 원전 프로젝트를 전폭 지원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서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선택지는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입니다. 앞으로 AP1000 프로젝트들이 시작될 것이고 저희는 여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한국을 참여시킬 수 있다면 한국형 원전인 ‘APR1400’도 도입되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에 비해 한국의 APR1400이 미국 내에서 실제로 추진될 가능성은 더 낮다고 보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네, 당장 다음에 시작될 프로젝트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부 간 협상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APR1400이 미국 땅에 지어진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 APR1400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보지만, 바로 다음 차례의 프로젝트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SMR이든 AP1000이든, 노형에 상관없이 ‘그다음 진행될 프로젝트’에 지금 당장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미국 내에서 입지를 먼저 구축한 뒤, 그 다음에 APR1400 같은 대형 노형으로 확장해 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APR1400 협상만 붙들고 있다면 향후 5년, 1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업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지금 당장 진입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 내에서 EPC 공급업체로 참여해 스스로의 EPC 역량을 미국 시장에서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두면 나중에 새로운 APR1400 프로젝트 기회가 왔을 때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할아버지 철학처럼... 원자력 국제 협력 여전히 필요
-실리콘밸리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에너지 분야의 기업가로 변신한 당신의 여정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두 가지 여정이 어떻게 연결되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실리콘밸리식 스타트업의 핵심 가설은 ‘ 아주 작은 신생 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큰 대기업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비즈니스를 배우면서 혁신의 속도와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이 있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 목격했습니다. 에너지 영역을 바라보았을 때도 역학 관계는 똑같았습니다. “회사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고객의 니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저도 원자력 에너지에 이 기법을 적용했습니다. “원전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죠. 알고 보니 기술이나 원자로가 부족한 게 아니라 ‘재무적 리스크’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재무적 리스크를 해결하고 프로젝트 주위에 연합을 구축하는 회사를 세운 것입니다.
-원자력 에너지 시장, 혹은 산업은 지정학적 구조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한 축의 동맹을 형성하고 있고, 반대편에 서구 동맹이 있습니다. 이 지정학적 구조의 흐름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 할아버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원자력을 다룰 때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철학으로 돌아가 보면, 러시아, 미국, 중국처럼 잠재적 적국들 사이에서도 더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핵분열 물질의 생산을 두고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기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계가 항상 그런 이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진 않지만 마땅히 그렇게 작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글로벌 협력의 여지는 분명히 있으며, 동시에 경쟁의 영역도 존재합니다. 현재 서구권이 직면한 문제는 러시아가 다른 국가에 원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고, 중국은 세계에서 원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자국 내에 건설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서구권은 이 두 나라에 뒤처졌고 아직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에 더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경쟁해야 합니다.
-대표님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할아버지에 대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의 유산이 본인의 삶과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할아버지의 유산은 제 커리어 전반기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자력이라는 ‘가족 비즈니스’로 뛰어든 커리어 후반기인 지금은 제게 가장 즐거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내가 글로벌 풍요를 만들고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에너지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우리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이죠. 저는 원자력 에너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철학이 세상의 위험을 줄이고 과학의 혜택을 늘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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