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좀 본 당신도 이런 건 처음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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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실험 세계에는 끝이 없다. 배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막이 내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관객이 객석을 떠나 극장을 자유롭게 누비는 공연도 있다.

사진=브러쉬씨어터

사진=브러쉬씨어터

오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하는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배우가 단 한 번의 리허설 없이 무대에 서는 실험성 짙은 연극이다. 사전 정보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에게 공연장은 마치 첫 리딩 현장과 같다.

대본은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 푸어가 썼다. 독특한 형식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2011년 세계 최대 공연 축제인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수상했다. 이후 30개 이상 언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번 한국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는 총 33명. 매일 각기 다른 배우가 한 명씩 무대에 선다. '연극계 대모'로 불리는 박정자 부터 20대 신예 김도연까지 다양한 세대의 배우가 이번 공연에 도전장을 냈다.

지난 11일에는 데뷔 45년 차 배우 송옥숙이 관객들을 만났다. "와. 이거 어떻게 여는거죠?" 이번 작품과 관련해 "가장 질문이 없었던 배우"로 소개받은 그는 무대 위 의자에 놓인 검은 봉투를 뜯고서야 처음 대본을 마주했다.

핵심 이야기는 이렇다. 한 남자가 하얀 토끼 다섯 마리를 굶긴 뒤 사다리 꼭대기에 당근 하나를 놓는다. 가장 먼저 당근을 발견해 먹은 토끼는 빨간색으로 칠하고, 나머지 토끼들에게는 얼음물을 뿌린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자 하얀 토끼들은 빨간 토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얼음물을 뿌리지 않아도 빨간 토끼에게 달려든다.

배우는 토끼 역할을 맡을 사람을 관객 중에서 뽑는다. 빨간 토끼가 된 관객은 당근을 먹는 시늉을 내고, 다른 네 명의 관객은 얼음물을 맞아 몸을 부들부들 떠는 즉흥 연기를 펼친다. 이외에도 관객이 자발적으로 무대에 올라 배우와 합을 맞추는 등 관객 참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극이다.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에 따라 예기치 못한 웃음이 터지기도,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참여자 중 한 명에겐 깜짝 선물도 주어진다.

지난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배우 송옥숙이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고 있다./사진=허세민 기자

지난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배우 송옥숙이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고 있다./사진=허세민 기자

작가는 이처럼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작가는 공연장에 없지만, 마치 옆자리에 앉은 듯 공연 내내 강한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고국 이란에서 강제 군 복무를 거역한 죄로 해외 여행을 금지 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이 공연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해 관객과 만난다.

토끼 우화 외에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많다보니 배우의 역량이 절대적인 작품이다. 송옥진은 "작품에 참여할지 고민이 많았다"는 고백이 무색하게 관록의 무대 장악력을 보여줬다. 처음 접하는 대본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면서도 대사 전달력이 뛰어났고, 좌우 앞뒤로 흩어져 앉은 관객들과도 골고루 시선을 맞추려 했다. 이는 곧, 배우가 누군지에 따라 연극의 완성도가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형식 자체는 신선하다. 다만 극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연극 입문자는 한 번에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작품의 진정한 묘미를 느끼려면 다른 배우의 공연과 비교 관람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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