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흑백요리사 2를 통해 장안의 화제가 된 셰프가 있다. 결승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한 ‘요리괴물’ 이하성이다. 그가 한국이 아닌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독립 레스토랑을 열었다. 지난달 초 영업 2일차의 오야뜨(Oyatte)를 찾았다.
5월 5일에 문을 연 이곳, 사실상 첫 손님 중 한 명으로 자리한 셈이었다. 다만 이 레스토랑을 방송 후광에 기댄 ‘셀럽 셰프 식당’ 정도로 접근한다면, 본질의 절반은 놓치는 셈이다.
흑백요리사 ‘요리괴물’ 이전의 셰프 이하성
이하성 셰프는 방송 출연 한참 이전부터 푸디계, 다이닝계에서 유명했다. 더 프렌치 런드리(The French Laundry), 그래머시 태번(Gramercy Tavern), 코펜하겐의 제라늄(Geranium), 그리고 결정적으로 뉴욕 아토믹스(Atomix)에서 셰프 드 퀴진(chef de cuisine)으로 재직하며 미슐랭 2스타를 함께 만들어낸 이력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중 하나로 뽑히기 손색이 없었다. 세계 최상위 파인다이닝 주방을 두루 거친 그가 십수 년 경력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 레스토랑이 오야뜨이다.
이름은 셰프의 성 이(李)의 옛 한국어 ‘오얏’에서 따왔다. 그러나 의외로 코스 어디에도 제대로 ‘한식 코스’라 부를 만한 요리는 없다. 쌀, 장아찌, 쑥, 깻잎, 막걸리 지게미 같은 한국적 재료는 오야뜨 안에서 ‘기억’의 층위로만 사용된다. 요리의 방향성은 차라리 더 프렌치 런드리식 농장 기반 컨템포러리 파인다이닝에 가깝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크라운 데이지 팜(Crown Daisy Farm)이라는 단일 농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채소와 허브를 받고, 발효와 보존의 터치가 코스 속 곳곳에 작은 형태로 들어가 있다.
1층 라운지에서 2층 다이닝룸으로
위치는 머레이힐 125 이스트 39번가(125 East 39th Street), 전형적인 뉴욕 브라운스톤이다. 좁고 높은 타운하우스 건물에 격자형 창이 달려 있어, 길에서 보면 손님들의 실루엣이 창 너머로 그대로 보인다. 동선이 흥미롭다. 손님은 1층 라운지 라뜰리에(L’Atelier)에서 작은 카나페와 스몰 델리커시(small delicacies)로 식사를 시작하고, 코스 중반에 2층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겨 메인과 디저트를 이어간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선 자체가 일종의 서사로 작동한다. 가격은 테이스팅 메뉴 210달러, 와인 페어링 170달러. 표면상 8코스로 표기되지만, 미냐르디즈(mignardises)까지 합쳐 실제 체감은 보다 더 장대하고 풍성한 구성이었다.
1층 라뜰리에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박선기 작가의 13피트 길이 투명 석영(quartz) 작품이다. 그 아래로는 작은 유리병들이 진열되어 있다. ‘4.16 체리 블라썸(4.16 Cherry Blossom)’, ‘툰 비네거 HL(Toon Vinegar HL)’, ‘드라이드 선초크 HL(Dried Sunchoke HL)’ 같이 손글씨로 라벨을 붙인 발효물과 보존물들이 있는데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실제 식사에 쓰이는 재료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발효와 보존이 이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축이라는 사실을 공간이 먼저 보여준다.
그러나 익힘이 모든 의심을 지웠다
첫 디쉬부터 코스의 방향성은 분명했다. 엠버스 오브 어스: 루트 베지터블 콘소메(Embers of Earth: Root Vegetable Consommé). 샐러리, 당근, 양파에 농장의 허브를 더해 우려낸 콘소메인데, 채소 콘소메 하면 흔히 떠올리는 ‘쓰고 직설적인 채소 그 자체의 맛’을 깨끗이 비껴간다. 복합적인 단맛과 감칠맛이 도는 데다 카레의 뉘앙스가 은은히 깔린다. 채소만으로 이런 깊이를 끌어내는 추출력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뒤따라 나온 발효 당근 도넛(Fermented Carrot Donut)은 한입짜리 디쉬가 얼마나 많은 레이어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찹쌀가루 도넛 안에 발효 당근을 채우고, 밑에 로얄 레드 슈림프(royal red shrimp)를 두고, 위에는 캐러멜라이즈드 캐럿(caramelized carrot) 폼을 올렸다. 도넛의 질감이 묘하다. 누룽지에서 바삭한 부분만 빼고 꾸덕한 부분만 남긴 듯한 식감이다. 당근의 단맛, 새우의 풍미, 발효 당근의 산미, 그리고 소스에서 따라오는 오렌지필의 뉘앙스가 한 입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1층의 정점은 추가 메뉴로 주문한 오이 & 카비아리 크리스탈 캐비아(Cucumber & Kaviari Kristal Caviar)였다. 오이를 여러 방식 - 오이 나물, 마늘부추 오일에 압축한 오이, 오이와 라임으로 뽑은 액체 등 으로 변주하고, 거기에 훈연한 메인산 장어 무스, 일본산 잘게 다진 오징어, 캐비아를 결합한 구성이다. 차가운 차완무시 같은 식감의 베이스에 캐비아가 단순한 토핑이 아닌 염도와 어란 같은 풍미의 중심으로 작동한다. 거기에 훈연 장어 무스의 스모키한 풍미가 받쳐주며 복합미가 깊어졌다.
2층으로 이동하여 진행된 다이닝룸에서는 익힘이 압권이었다. 노바 스코샤(Nova Scotia)산 광어(halibut) 디쉬는 살짝 포칭한 광어에 뱅스 아일랜드(Bangs Island)산 홍합, 피클드 & 스모크 처리한 유콘(Yukon) 감자, 그리고 감자 껍질과 훈제 생선뼈로 만든 소스가 곁들여진다. 광어가 광어 같지 않게 탱탱하고 쫄깃한 텍스처를 유지한다. 마치 일본에서 경험한 좋은 그리고 아주 살짝만 익힌 관자를 먹는 듯한 질감이었다. 한국인 셰프가 만든 요리에서 이런 익힘은 처음 경험한 것 같다. 괜히 이하성 셰프가 흑백요리사 출연 한참 전부터 다이닝계에서 유명한 게 아니구나, 이 한 접시를 먹고 제대로 실감했다.
같은 코스의 다른 옵션 스프링 그린 포리지(Spring Green Porridge)는 흑백요리사 2에서 안성재 셰프에게 처음 선보였던 죽의 연장선이라 알려진 시그니처 코스다. 두 종류의 현미(brown rice)를 허브 소스에 익히고, 위에는 흑마늘 가스트리크와 간장에 보존한 블랙 윈터 트러플, 미나리를 곁들였다. 밑은 누룽지의 가장자리 텍스처가, 위는 알덴테로 살린 쌀알 식감이 살아 있고, 맛은 한식의 강된장 뉘앙스가 또렷이 났다. 인공적인 감칠맛이나 과한 단맛은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깊이인데 한식의 기억과 글로벌 파인다이닝의 형식이 만나는 지점이 어떤 식인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코스였다.
메인 코스는 소노마 카운티 울프 랜치(Sonoma County Wolfe Ranch)의 메추리와 엘리시안 필드 팜 램(Elysian Field Farm Lamb)의 갈림길로 펼쳐졌다. 울프 랜치는 더 프렌치 런드리 인근의 농장으로, 브리더 브렛 울프(Brett Wolfe)가 수십 년의 교배 끝에 살집이 두툼하고 쥬시한 메추리로 길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모크 처리한 메추리에 브레이즈드 아인콘(brased einkorn)을 베이스로 깔고, 강하게 구운 흰 아스파라거스와 퍼멘티드 발리 버터 홀란데이즈(fermented barley butter hollandaise)를 곁들였다. 메추리는 비주얼부터 아름다웠고, 칼로 써는 순간 탱탱하고 찰지면서도 부드러운 균형이 살아 있었다. 램의 직선적이고 묵직한 육향과 비교하며 먹는 즐거움이 컸다.
쑥 아이스크림 디저트가 나올 때, 이하성 셰프가 직접 테이블로 나와 한국어로 설명했다. “쑥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에 농장에서 가져온 파바 콩순으로 만든 샐러드, 그리고 메이어(Meyer) 레몬과 키위를 곁들였습니다. 샐러드 디저트입니다.” 아이스크림의 키위 향이 은근히 셌고, 그에 밀리지 않는 채소와 허브의 그린한 향이 강하게 펼쳐졌다. 전통적인 프렌치 디저트라기보다 채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모던한 디저트였다.
마지막 디저트는 프리저브드 카라카라 오렌지(Preserved Cara Cara Orange). 보존 처리한 카라카라 오렌지를 베이스로 마쉬멜로 바셰랭, 블랙 진저 샹티이, 옐로우 벨 페퍼 소스가 곁들여졌고, 위에 다시마(kombu) 가루를 뿌려 마무리했다. 서버의 안내에 따라 스푼 옆날로 단단한 머랭 위쪽을 깨뜨려 먹는데, 그 갈라지고 부서지는 식감이 훌륭했다. 안에서 풀려나오는 옐로우 벨 페퍼의 산뜻한 스파이시함이 시트러스 톤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아이스크림에서 따라 올라오는 미세한 피망의 향이 옐로우 벨 페퍼 소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 정교한 향의 사용에 더 감탄하게 된다.
뉴욕 미식의 새로운 좌표
이번 방문 이틀 후, 나는 토마스 켈러(Thomas Keller)의 펄 셰(Per Se)를 찾았다. 오야뜨와 펄 셰의 공통점을 한 가지 꼽으라면 바로 테크닉의 정교함이었던거 같다. 지금까지 나는 뉴욕의 다이닝 수준이 파리나 도쿄에 비해 한 단계 아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두 레스토랑을 연달아 방문하며, 적어도 테크닉 측면의 최상단 레스토랑들은 충분히 동급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특히 오야뜨에서 경험한 관자와 광어의 익힘은 프랑스 미슐랭 3스타에서 경험한 것들과 충분히 겨룰 만한 월드클래스 수준이다.
물론 영업 2일차의 빈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서비스의 편차와 테이블 배치, 2층 나무 바닥의 미세한 소음 같은 부분은 영업이 안정화되며 자연스럽게 다듬어질 영역이다. 흑백요리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이하성의 일부였다면, 오야뜨는 그가 십수 년 동안 가다듬어 온 본업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인 셰프가 뉴욕 파인다이닝 씬에서 자신의 언어로 그리는 요리가 이미 월드클래스의 좌표 위에 있다는 사실. 이 자체가 이번 식사의 결론이었다.

2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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