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의료 강국이다. 임상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을 다투고 정보기술(IT)과 결합한 스마트 헬스케어 시스템은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투석실의 풍경 뒤에는 뼈아픈 역설이 존재한다. 환자의 혈액을 걸러주는 혈액여과기 필터와 복잡한 기계장치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만성콩팥병 환자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건강보험 지출 역시 단일 질병 기준으로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막대한 예산의 상당 부분은 독일, 미국, 일본 등 글로벌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인 기술 확보, 즉 의료 기술의 자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이 혈액투석 국산화라는 길에 나서게 된 근본적인 이유다.
의료 주권은 단순히 국산 제품을 사용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보건 안보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다.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이를 절감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되자 돈이 있어도 마스크와 백신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했다.이 같은 교훈은 다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2월 28일 미국과 이란 간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제한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이 해협은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20%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통로다. 플라스틱 의료기기의 주요 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혈액투석용 튜브를 비롯한 필수 의료 소모품 공급에도 차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투석 환자용 소모품 부족 우려가 커지자 지난달 31일 정부 차원의 의약품·의료기기 수급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만약 혈액투석 필터 공급이 단 일주일만 중단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내 9만 명이 넘는 투석 환자에게는 생명 유지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로 이어진다. 단기적인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의료 위기로 확산할 수 있다.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혈액투석은 대체재가 없는 필수 의료다. 그럼에도 핵심 소모품과 장비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국민의 생명줄을 타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와 다르지 않다. 오늘은 호르무즈 해협이지만 내일은 또 다른 분쟁이 의료 공급망을 위협할 수 있다. 의료 공급망의 자립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필자는 신장내과 전문의로서 혈액투석 의료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오랜 기간 다양한 기업 및 연구기관과 협력해 왔고 정부에도 지속해서 국산화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그 과정에서 국내 필터 및 소재 전문 기업과 협력해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착수했고 수년간의 노력 끝에 혈액여과기 국산화라는 성과를 이뤄냈다.임상을 통해 확인한 국산 혈액여과기의 데이터는 고무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세계 1위 제품과 비교해 독성물질 제거율과 안정성 면에서 뒤처지지 않았으며 일부 항목에서는 오히려 더 우수한 성능을 나타냈다. 이는 국산 기술력이 글로벌 수준에 도달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의료 주권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딘 연구자의 노력, 국산 제품의 가능성을 믿고 임상에 참여한 환자와 의료진의 헌신,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기업의 의지가 모여 비로소 시작된다.
일본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세를 통한 보호 정책으로 과거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현재는 90% 이상을 국산화했고 세계시장에서도 주요 공급국으로 도약했다.
현재 국제 정세는 특정 국가 간 충돌을 넘어 지역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을 보인다. 세계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시기일수록 의료 공급망의 자립은 더욱 중요하다.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의료계의 선택, 기업의 투자와 노력이 결합한다면 우리나라도 전량 수입국에서 벗어나 ‘K-혈액투석 의료기기’를 수출하는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진지하게 응답해야 할 때다.
김동기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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