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는 1990년대 말부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팔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게 주력 제품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회사 몸집은 5000배 커졌다. 1조2000억원이던 시가총액이 지금은 6600조원이다. 제품 대신 시장을 바꾼 덕이다. 게임용 그래픽을 처리하던 GPU가 대규모 연산에 적합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공지능(AI) 학습용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장과 GPU의 쓰임새를 바꾼 주역은 정작 엔비디아가 아니다. 여러 대학원생의 도전과 실험이 이뤄낸 결과다.
시작은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인 이안 벅이었다. 2000년대 중반 GPU를 대규모 연산작업에 쓰는 방안을 연구했고, 그게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CUDA)의 개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대 박사과정생 알렉스 크리젭스키가 2012년 쿠다를 활용해 AI를 학습시킨 뒤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우승하며 딥러닝 혁명을 촉발했다. 이후 외부 젊은 개발자들이 AI를 학습시키는 데 쿠다를 앞다퉈 이용했다. 그렇게 GPU 생태계가 조성됐다.
요즘 한국 산업정책의 최대 화두는 ‘K엔비디아’ ‘K앤스로픽’이다. 우리 정부가 이런 회사를 키우겠다며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투자에 나서고 있다. 얼마 전 첫 번째 투자처로 신안우이 해상풍력 사업을 선정했고, 개별 기업 중에선 신경망처리장치(NPU) 기업인 리벨리온을 1호로 낙점했다.
정부가 특정 산업에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기대도 크다. 일단 시작은 좋아 보인다. 전력 인프라와 AI 추론용 반도체 시장은 미래 AI 경쟁을 주도할 두 개의 축이다. 국내 최대 풍력사업과 국내 최대 AI 추론용 반도체 스타트업을 1호로 택한 것은 상징성이 크다. 특히 AI 추론용 반도체 분야는 요즘 가장 뜨거운 기술 전장(戰場)이다. AI 학습 시장을 엔비디아가 주도해왔다면, AI가 그 학습 내용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AI 추론 시장은 아직 뚜렷한 승자가 없다. 미국 빅테크들과 한국, 영국,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이 가세해 몸집 불리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해외 스타트업들은 시리즈 투자 때마다 수조원씩 빨아들이고 있다. 이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리벨리온 같은 한국의 AI 추론 분야 기업에도 더 많은 투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K엔비디아, K앤스로픽을 만들어내는 건 다른 얘기다. 개별 기업에 자금을 들이붓고 관련 인프라를 늘린다고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나올까. 이건 산업의 토양과 생태계를 바꾸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왕 역대급 산업 지원금을 마련했으니 이참에 산업 구조의 가장 밑단까지 들여다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열악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의 이공계 학생과 연구자들 말이다.
미국은 4년 전 반도체산업에 2800억달러(약 420조원)를 투자하는 칩스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반도체산업에 직접 투자하는 자금은 527억달러에 그친다. 나머지 자금의 상당액을 대학과 개발자 커뮤니티, 민간 연구소 등을 지원하는 데 쓰도록 했다. 중국도 ‘반도체 자립’을 추진하며 가장 먼저 대학 중심의 기술 연구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국가 간 반도체 주도권 경쟁은 궁극적으로 인재와 연구 생태계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메타가, 스탠퍼드대 연구실에서 구글이 움텄다. 대학원생들이 합작해 엔비디아를 위한 시장을 열고, 연구자 커뮤니티가 앤스로픽의 자양분이 됐다. 당장은 성과를 기약할 수 없는 더딘 길이지만 우리에게도 그게 K엔비디아로 가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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