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父·인도 母 슬하서
떨이 장난감 채로 입문
차박하며 투어 다니고
그립 닳을까 테이프 감아
어려운시절 잊지 않으려
아직도 양손에 검은 장갑
“뒤풀이로 치플레 들를 것”
닳고 닳은 아이언 그립 위에 검은색 전기테이프를 칭칭 감고, 구멍이 나면 어머니가 실과 바늘로 꿰매준 양손 장갑 한 켤레로 2년을 버티던 소년이 마침내 세계 골프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섰다.
18일(한국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에러니밍크 골프클럽(파70)에서 막을 내린 메이저 골프 대회 PGA 챔피언십. 에런 라이(영국)가 대회 최종일 5언더파 65타를 작성하며 합계 9언더파 271타로 욘 람(스페인), 앨릭스 스몰리(미국) 등 공동 2위 그룹을 3타 차로 따돌리고 메이저 챔피언에 등극했다.
1919년 짐 반스 이후 무려 107년 동안 그 어떤 잉글랜드 선수도 품에 안지 못했던 워너메이커 트로피를 들어 올린 라이를 향해 외신들은 ‘100년 묵은 저주를 깨뜨린 대이변’이라며 찬사를 쏟아냈다.
어릴 적 타이거 우즈의 빛바랜 비디오테이프를 수없이 돌려보며 경외감에 휩싸였던 소년은 이제 우상이었던 그의 이름이 새겨진 메이저 트로피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올리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란을 완성했다.
‘검은색 양손 장갑’과 ‘아이언 커버’로 잘 알려진 라이. 그의 여정은 인도 출신인 아버지와 영국으로 이주한 케냐 출신의 어머니가 꾸린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시작됐다.
4세 때 어머니가 동네 할인 매장에서 원래 사려던 테니스 라켓보다 더 싸다는 이유로 산 ‘떨이 플라스틱 골프채’가 그의 운명을 바꿨다. 장난감 골프채를 잡은 라이가 초콜릿 통과 양말 뭉치를 치는 족족 문틈 사이를 통과시키자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날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의 코치이자 매니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전국을 다니며 치르는 주니어 투어 비용은 늘 모자랐다. 라이 부자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을 청했고, 어머니가 싸준 차가운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실력을 키웠다. 어머니도 살림과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밤낮없이 땀을 흘렸다.
이런 눈물겨운 시간 속에서 라이의 상징인 검은색 양손 장갑 역사도 시작됐다. 8세 때 밤낮없는 연습으로 어린 아들의 손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나자 아버지는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 장갑 후원을 요청했고, 한 업체가 양손 장갑 세트를 기부했다. 장갑이 닳아 구멍이 날 때마다 어머니는 해진 가죽을 바느질로 기워줬고, 장갑 하나로 1~2년을 쓰던 소년은 기운 장갑이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그립을 극도로 부드럽고 정교하게 쥐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또 아버지가 주변에서 얻어다 준 낡은 중고 아이언의 그립이 찢어지면 전기테이프로 칭칭 감아 사용해야 했다.
아이언 커버도 마찬가지다.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전 재산을 털어 사준 생애 첫 새 장비인 타이틀리스트 아이언 세트를 받은 후 라이는 부모님의 피땀이 서린 소중한 채에 흠집을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 아이언 커버를 씌우는 습관이 시작됐다.
라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내가 지금도 아이언 커버를 씌우고 양손 장갑을 고수하는 이유는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를, 그리고 그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라며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정이 북받친 채 부모님을 떠올린 그는 “내가 부모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모두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골프에 전념하셨고, 어머니는 오랜 시간 일하며 엄청나게 지원해주셨다. 부모님이 베풀어준 지지와 보살핌,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라이의 우승에는 무엇보다 메이저 대회 최종 라운드의 압박감을 이겨낸 강한 멘탈이 주요했다. 이 또한 결핍이 만들어낸 소중한 유산이다. 라이는 “우리는 골프라는 스포츠가 요구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돈 대신 ‘인내’와 ‘감사’라는 가장 비싼 자산을 물려주셨다. 그래서 난 필드 위에서 어떤 위기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힘들었던 주니어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위기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프로골퍼 출신인 아내에게도 감사함을 전한 라이는 우승 상금으로 369만달러(약 55억3000만원)를 받았지만 “우승 뒤풀이로 아마 패스트푸드점인 치폴레에 들를 것 같다”고 말해 그가 초심을 굳건히 지키고 있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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