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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의 고장인 전북 순창군 순창장본가에서 강순옥 식품명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장은 그냥 담그는 게 아니여. 땅 기운이 살아야 진짜 맛이 나지”
전북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 안 ‘순창장본가’라 적힌 순창 고추장만들기 체험 시설에서 강순옥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4호)을 만났다. 비록 그럴듯한 한옥집이나 장독대는 없었지만, 이 공간은 이미 수십 년 간 쌓여온 장맛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명인은 장을 담그는 일이 단순한 조리나 비법의 영역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내용은 깊고 단단했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세월을 버티고 지켜온 장인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강 명인이 빚어온 고추장은 그저 음식이 아니다. 계절의 숨결, 땅의 기운,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철학이 오롯이 담긴 문화다. 스스로는 “장을 담그는 사람일 뿐”이라며 겸손을 보였지만 그 손끝은 한국인의 미각을 지켜온 세월의 증인이다. 장류의 고장인 전북 순창군 순창장본가에서 강순옥 식품명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 명인은 늘 순창의 맑은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른 새벽, 직접 고추씨를 빻아 곱디고운 고춧가루를 만들고 찹쌀밥을 지어 엿기름과 섞는다. 이어 장독대 앞에 서면, 드디어 장을 담그는 시간이다.
“그날은 온 집안이 장 향으로 가득혀. 그 냄새 맡으면 어매 생각이 나불고”
강 명인의 고추장은 어머니의 손맛이자 기억의 연장선이다. 어린 시절, 그는 늘 어머니의 곁에 있었다. 짚으로 엮은 메주를 닦으며 곰팡이의 결을 익히고, 장독대에 쏟아지는 햇살과 어머니의 말 없는 가르침 속에서 장인의 길을 자연스레 걸었다. 장을 담근다는 건 그에게 단순한 요리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잇는 문화이자 철학이었다.
순창 고추장의 핵심은 메주다. 간장용 메주는 콩으로만 만들지만, 고추장용 메주는 훨씬 섬세하고 까다로운 준비가 필요하다. 강 명인은 콩을 직접 선별하고 삶아 수작업으로 찧은 뒤 메주틀에 눌러 정성껏 빚는다. 그렇게 만든 메주는 순창 유등천의 맑은 물과 산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먹으며 천천히 숙성된다.
“메주가 살아야 장도 사는 거여. 숨을 쉬게 해야 맛이 나지”
그에게 발효는 과학이자 예술이다. 효소와 미생물, 온도와 습도, 햇살과 그림자까지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순창 특유의 해발 300~500m 산세는 미기후를 만들어 발효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이 자연환경이 바로 순창 고추장 맛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 이유다. 소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강 명인은 서해산 천일염만을 고집한다. 그마저도 정제 과정을 거쳐 사용한다.
“그냥 짜기만 한 소금으론 안 돼. 잡균도 잡고, 맛도 살리려면 염도가 안정돼야혀”
소금은 단순한 재료가 아닌, 발효 속도를 조절하고 장의 감칠맛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그는 소금 하나까지도 살아 있는 생명처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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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의 고장인 전북 순창군 순창장본가에서 강순옥 식품명인이 담근 고추장 메주 |
기다림이 빚는 깊은 맛
“햇살 좋은 시간에 장을 저어주고, 계절 따라 염도를 살펴야혀.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 감각이 있어야지”
강 명인의 고추장은 단맛, 매운맛, 구수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 비결은 단 하나, ‘기다림’이다. 장맛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기계가 아닌 사람의 감각이다. 자연의 리듬을 읽고, 발효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 순창 고추장이 지닌 가장 인간적인 가치는 바로 이 느림 속에서 탄생한다.
“외국산은 싸고 편하지. 허지만 맛이 달러. 나는 내 이름 걸고 장을 담그는 사람이여. 그럼 제일 좋은 걸 써야지. 그게 내 책임이지”
그의 고집은 ‘국산’이라는 두 글자에서도 드러난다. 사용하는 콩, 고추, 소금 모두 국내산이다. 그는 농민들과 긴밀히 협업해 고품질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다. 국산 콩은 단맛이 뛰어나고 고소함이 깊어, 발효가 진행될수록 그 진가가 더욱 도드라진다.
왜 하필 순창일까. 해발 300~500m의 산이 마을을 감싸고, 유등천이 흐르는 순창의 지형은 발효에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제공한다. 조선시대 순창 장은 궁중에 진상되었고, ‘만일사 스님이 고추장 한 숟가락으로 천 명을 살렸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순창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닌, 한 시대의 삶과 이야기를 담은 그릇이다.
고추장, 세계로 향하다
“장맛을 이해하면 한국인의 음식 철학도 보이는 거여”
강 명인의 고추장은 국경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그의 고추장은 국내외 셰프들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프랑스의 한 셰프는 “이건 소스가 아니라 하나의 요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협력해 해외 요리학교와 요리사 대상의으로‘장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순창 고추장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에게 고추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미학, 그리고 인내를 담은 문화유산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장독대를 돌며 온도를 살피고 색을 확인하는 이유다.
“전통은 멈춰 있는 게 아녀. 시대 따라 걸어가야 살아있는 거지”
그는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쏟는다. 순창고추장민속마을에서 젊은 장인들과 함께 지식을 나누고, 발효 과학 관련 논문을 읽으며 전통을 현재로 이어간다. 그는 후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으론 보지 말고, 냄새로 듣고 손으로 말혀봐.” 장은 오감을 넘어서는 감각으로 완성되는 예술이다. 레시피는 종이에 담기지만, 장맛은 삶에서 우러난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하나다. “고추장이 세계인의 밥상에 오르는 날을 보고 싶어. 그냥 양념이 아니여. 발효, 숙성, 인내, 정성… 다 담긴 그릇이제. 거기엔 이 땅의 풍경도, 내 삶도, 다 녹아 있는 것이여. 그게 바로 순창 고추장이 가진 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