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발명된 직후, 자연스럽게 ‘누구의 차가 더 빠르고 튼튼할까?’라는 원초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모터스포츠는 자동차의 탄생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경주에서 축적된 첨단 기술은 양산차에 적용하고, 스포츠의 서사는 마케팅에 쓰인다. 그러면서 차츰 고성능 프리미엄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쌓는다.
출범 10주년을 목전에 둔 현대자동차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Genesis)는 지금 그 거대한 전환점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동안 제네시스는 역동적인 우아함이라는 고유의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왔다. 그리고 이제 안락함이라는 기본 가치 위에 하이퍼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DNA를 이식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왜 내구 레이스인가, 고성능 프리미엄의 진화
수많은 모터스포츠 카테고리 중 제네시스가 유독 내구 레이스를, 그중에서도 세계 내구 선수권 대회(WEC)와 북미 IMSA 웨더텍 챔피언십(2027년)을 선택한 배경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내구 레이스는 최소 3시간에서 길게는 24시간 동안 중단 없이 극한의 속도로 서킷을 달리는, 기계와 인간 모두에게 가장 가혹하고 변수가 많은 극한의 스포츠다. 포르쉐, 페라리, BMW, 캐딜락, 푸조 등 한 세기 가까운 혹은 세기를 넘긴 역사를 지닌 전통의 명가들이 이곳에서 차의 뼈대와 심장을 혹사시키며 한계를 극복해 온 강렬한 서사를 대중에게 증명해 왔다. 제네시스 역시 브랜드의 위상을 한 차원 격상시키고 하이퍼 퍼포먼스에 대한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이 거대한 장벽에 선제적으로 출사표를 던지고 100년 역사의 거인들과 정면 승부를 택했다.
냉철한 실용주의와 시장 타깃팅, LMDh 규격이 품은 경제학
흥미로운 점은 제네시스가 이 무대에 진입하는 전략적 방식이다. 현재 내구 레이스 최상위 클래스에는 차의 모든 것을 제조사가 독자 개발해야 하는 LMH(Le Mans Hypercar) 규격과 섀시 및 하이브리드 시스템 일부를 공용화하는 LMDh(Le Mans Daytona h) 규격이 공존한다. 제네시스는 LMDh 규격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단일하게 개발된 LMDh 규격은 유럽 중심의 WEC뿐만 아니라, 거대한 북미 대륙을 순회하는 IMSA 챔피언십에 동시에 출전할 수 있다. 제네시스 전체 판매량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북미 시장의 하이엔드 소비자에게 퍼포먼스 기술력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최적의 전략인 셈이다.
섀시 개발 리스크를 세계적인 제조사 오레카(Oreca)와의 협력으로 상쇄하는 대신, 브랜드 핵심 역량인 내연기관 엔진 개발과 공기역학 설계, 통합 제어 소프트웨어 기술에 R&D를 집중하는, 겸손하면서도 합리적인 노선을 택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뼈대를 외주에 의존한 반쪽짜리 기술력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등고자비(登高自卑), 우보천리(牛步千里)인 법이다. 제네시스에 이번 도전의 목적은 명확히 투자 대비 수익(ROI)이다.
기술적 독립과 미학의 융합, GMR-001 하이퍼카의 탄생
이러한 치밀한 전략 아래 탄생한 제네시스의 첫 하이퍼카 GMR-001은 한국 자동차 공학의 결정체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곳은 단연 심장부인 G8MR 3.2L 트윈 터보 V8 엔진이다. 이 엔진에는 랠리의 유전자가 흐른다. 현대 모터스포츠가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등 험난한 오프로드를 누비며 축적해 온 최고 수준의 터보 엔진 노하우가 이식됐다. 최대 1만RPM을 넘나들며 시스템 합산 최고 680마력의 폭발적인 힘을 내뿜는 이 심장은 실제 서킷에서 지구 반 바퀴가 넘는 2만 5000㎞의 혹독한 주행 테스트를 거치며 한계 내구성을 획득했다.
디자인 역시 공기역학 효율을 극대화하면서도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전면부를 장식하는 시그니처 투 라인(Two-Line) 헤드라이트는 르망의 기나긴 야간 레이스에서 최고의 가시성을 제공하는 기능적 부품이자, 멀리서도 제네시스임을 뿜어내는 강력한 시각적 인장이다. 마그마 오렌지 컬러 도장에 태극기 문양과 한글 로고를 새겨 넣은 GMR-001은 글로벌 무대 한복판에서 한국 프리미엄 브랜드의 긍지를 가감 없이 표출한다.
과연 낙수 효과로 이어질까?
기업이 이토록 막대한 자본과 두뇌를 위험천만한 레이싱에 투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꼭 트로피 자체에 있지는 않다. 레이스카가 극한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와 부품의 한계치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낸 엔지니어링 노하우를 소비자용 양산차로 온전히 이식하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주자가 바로 지난 1월에 출시한 제네시스 브랜드 최초의 고성능 전기차 GV60 마그마다.
그런데 GV60 마그마만 두고 보면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제네시스가 참전하는 LMDh 하이퍼카 규격은 섀시뿐만 아니라 전기 모터(보쉬), 배터리(윌리엄스), 기어박스(엑스트랙) 등 전동화와 관련된 핵심 부품을 주최 측이 지정한 공용 규격으로 의무 장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제네시스 연구진이 트랙 위에서 밤을 새워가며 100% 독자 기술로 깎고 다듬어 한계를 시험하는 영역은 주로 V8 내연기관 엔진으로 보인다. 엇박자가 아닐까?
이러한 물음표는 제네시스의 중장기 로드맵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제네시스는 글로벌 전기차 캐즘(수요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2027~2028년 전후로 G80 마그마, GV80 쿠페 마그마 등 대형 고성능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준비 중이다. GMR-001 레이스카는 곧 시장에 쏟아질 이 하이브리드카들을 선행 개발하는 직접적인 R&D 테스트베드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전기차와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않다. V8 엔진과 전기 모터의 이질감을 없애고, 에너지를 1,000분의 1초 단위로 배분하는 하이브리드 통합 제어 로직은 제네시스의 몫이다. 경주차의 타이어를 아끼기 위해 어느 타이밍에 전기 모터를 개입시킬지, 한정된 배터리를 어떻게 회생 제동으로 채울지에 대한 극한의 소프트웨어 설계 능력은 고성능 전기차 시대의 최고 난도 영역이기도 하다.
트랙에서 벼려낸 이 정밀한 두뇌는 GV60 마그마의 네 바퀴를 독립적으로 제어하는 e-VMC 2.0(전자식 사륜구동 토크 벡터링) 기술로 직결된다. 또한, 무거운 배터리를 얹은 고성능 전기차를 초고속에서 롤링(차체 쏠림) 없이 안정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레이스카 수준의 극단적인 서스펜션 지오메트리와 공기역학 기술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분당 2만 바퀴 이상 도는 레이스카 모터의 열과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극한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열 관리(Thermal Management) 데이터는 GV60 마그마의 고전압 배터리 제어 시스템(HPBC)을 완성하는 결정적 자양분이다.
이제 시작, 전설을 향한 험난한 첫걸음에 박수를
제네시스가 준비한 결과는 2026년 WEC 정규 시즌 데뷔부터 놀라운 이변으로 나타났다. 데뷔전이었던 이탈리아 이몰라 6시간 레이스에서 제네시스를 바짝 추격하던 페라리의 에이스 드라이버 니클라스 닐센이 “저 차가 왜 우리보다 코너에서 빠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당혹감을 표출한 무전은, 왠지 모를 애국심까지 불러일으켰다. 신생팀으로서는 완주조차 버거운 첫 데뷔 무대를 두 대의 경주차가 무사히 체커기를 받으며 탄탄한 기초 전투력을 증명했다.
올해 WEC 개막과 함께 증명해 낸 제네시스의 잠재력은 서막에 불과하다. 유럽 명가들이 득실거리는 트랙에 뛰어들어 그들의 헤리티지를 흡수하고, 그 데이터를 차세대 고성능 하이브리드와 전기차에 이식하기 위해 이들은 치열히 싸울 것이다. 팔짱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보다 조용히 응원의 박수를 보낼 때다.

2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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