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유일 무대 조명디자이너 안효영
초 3때 엑스 재팬 보고 조명 꿈 키워
“과학으로 ‘좋은 빛’의 비밀 풀어내
이젠 한국서 ‘비움의 미학’ 펼치고파”
“관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조명이 좋았다’가 아니라 ‘이야기가 좋았다’예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무대 조명디자이너 안효영(30)의 말이다. 조명디자이너가 가장 뿌듯한 순간이 자기 존재가 안 보이는 순간이라니,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는 이 역설이야말로 좋은 조명의 본질이라고 했다.
최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효영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대학 특강을 위해 잠시 귀국한 참이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졸업 후 2021년 영국으로 건너가 로즈 브루퍼드 칼리지 석사를 우등으로 마쳤고,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 조명팀에서 한국인 최초로 근무했다. 토니상 연극 부문 역대 최다 노미네이션(13개)을 기록한 연극 ‘스테레오포닉’의 웨스트엔드 프로덕션에 협력 조명디자이너로 참여했으며, 세계적 학술 출판사 루틀리지에서 신경미학을 조명 디자인에 접목한 영문 단독 저서도 펴냈다.
좋은 조명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피카소의 ‘황소’ 연작을 꺼냈다. “디테일한 황소에서 하나씩 빼면 곡선과 직선만 남잖아요. 디테일은 빠졌지만 원본의 에센스는 살아 있죠. 조명도 마찬가지예요. 작품 속 세상의 원본을 왜곡하고 생략하되, 본질은 남기는 거예요.” 뮤지컬 ‘라이온 킹’ 오프닝에서 광활한 태양이 떠오르면 관객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프리카 초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 데자뷔를 만드는 힘이 조명이라고 했다. 반대로 나쁜 조명은 “기술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조명”이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는데 무대만 화려하면 내러티브는 잊혀져요. 조명 감독은 카멜레온 같아야 해요. 작품에 스며드는 거지, 자기 주장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좋은 빛의 원리를 직관이 아닌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붙든 것이 ‘신경미학’이다. 신경미학은 사람이 예술작품을 볼 때 느끼는 아름다움을 뇌의 반응으로 풀어내는 학문으로, 1990년 런던대학교(UCL)의 세미르 제키 교수가 창시했다.
그는 신경미학을 통해 “조명은 홀수로 배치하라”는 업계 관행등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10년 넘게 이유를 몰랐는데, 석사 논문에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대칭을 파악하고, 홀수 배열은 정가운데 기준점이 있어 이목을 쉽게 끈다는 걸 밝혀냈어요.” 그가 자주 활용하는 개념은 인지심리학의 ‘매직넘버 7’이다. 사람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약 7가지라는 이론이다. “무대 위 시각 정보가 이 한계를 넘으면 관객이 집중력을 잃어요. 예전에는 직관으로 ‘좀 과한 것 같은데’ 했는데, 신경미학을 쓰면 오차를 줄이는 가이드가 생기는 거죠.”
한국과 영국 무대의 차이에 대해서는 환경적 맥락을 짚었다. “영국 대극장이 500~700석이에요. 백스테이지도 좁아서 세트를 둘 공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작품 본질에 집중하게 된 거예요. 한국은 넓은 다목적 극장이 많다 보니 조명도 세트도 많이 쓸 수 있어서 화려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환경적 측면이 있어요.” 그는 3월 BTS 광화문 컴백공연에 대해서도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월드투어급 조명을 꾸린 쇼케이스, 전 세계 어느 가수도 이렇게 못 한다”며 높이 평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 밴드 X재팬 영상을 보고 기타가 아니라 빛에 먼저 마음이 갔다는 소년은, 중학생 때 세계적 조명디자이너에게 이메일을 보내 유일하게 답장을 받았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유학길에 오른 끝에 20대에 웨스트엔드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 그는 “비움의 미학, 어둠의 미학”을 들고 한국 연출가들의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빛을 더하는 게 아니라 덜어냈을 때, 관객이 비로소 이야기를 보게 되는 그런 작품을 한국에서 올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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