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 둥관 일대에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창업 기지가 있다.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 등의 연구와 창업을 지원하는 '엑스봇파크(XbotPark)'가 그 주인공이다. '중국 창업의 대부'로 꼽히는 리쩌샹 홍콩과기대 교수가 만든 이 시설은 10년간 70여 개 스타트업을 세상에 내놓으며 '스탠퍼드-실리콘밸리' 모델의 중국 버전을 구현했다. 세계 1위 드론 기업 DJI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DJI 창업자 왕타오는 리 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 대학 졸업 프로젝트로 드론을 개발하며 창업에 나섰다.
기숙사에서 조립한 헬기, 세계 1위가 되다… DJI 창업 신화
5일 테크업계에 따르면 DJI는 '드론 업계의 애플'이라 불린다. 이 회사가 글로벌 민간 드론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DJI는 전 세계 드론 산업의 정상에 있다"고 평가했다. DJI의 성공은 왕타오 개인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중국 제조 산업의 기술 자립과 공급망 통합 역량이 결합된 '하드웨어 창업 신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왕타오는 1980년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는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 속에 선전으로 이주해 중소기업을 운영했다. 부모의 사업으로 왕타오는 어린 시절 항저우에 남아 교사 집에서 자랐고, 우연히 접한 만화책 속 헬리콥터에 매료돼 모형 헬기 조립에 푹 빠졌다. 당시 모형 헬기 한 대 가격은 직장인 월급의 7배에 달할 정도로 고가였던 탓에 왕타오는 부모에게 조를 수 밖에 없었다. 왕타오의 부모는 모형 헬기를 사주지 않으려 “성적을 올리면 사주겠다”고 말했지만, 끝내 왕타오는 성적을 끌어올려 원하는 헬기를 손에 넣는 집념을 보였다.
고교 졸업 후 왕타오는 상하이의 명문인 화둥사범대학에 입학했지만 사범대 특유의 교육 중심 커리큘럼이 맞지 않았다. 결국 3학년 때 중퇴하고 홍콩과기대 전자컴퓨터공학과로 옮겨 본격적으로 비행 제어 시스템을 연구했다. 그곳에서 왕타오는 리 교수를 만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왕타오의 졸업 프로젝트로 원격제어 헬기의 제어 시스템을 리 교수가 제안하면서다. 왕타오는 기숙사 방에서 직접 부품을 조립하고 테스트를 반복했다. 그렇게 2006년 선전에 DJI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드론 제작에 나섰다. 초기에는 항공 모델용 비행 제어기를 만들었지만 2008년 네 개의 프로펠러가 달린 쿼드콥터를 선보이며 방향을 전환했다.
초기에는 시장 반응이 신통치 않았지만 누구나 쉽게 조종할 수 있는 '팬텀(Phantom)' 시리즈를 2013년에 내놓으면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DJI 드론은 조립이 필요 없고 꺼내자마자 바로 날릴 수 있는 일체형 제품으로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뉴스나 영화 촬영, 농업·산업 분야에 특화된 드론을 잇달아 출시하며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왕 대표는 "기술만으론 부족하다"며 "고객이 원하는 사용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 아래, 제품 기획에서 생산, 유통까지 수직계열화된 공급망을 빠르게 구축했다.
그는 사무실 책상 옆에 간이침대를 놓고 주 80시간씩 일하며 신제품을 5~6개월마다 내놨다. 기존 업체들이 5년을 들이는 것과는 개발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DJI는 플라이트 컨트롤러, 짐벌, 영상 송출 시스템 등 핵심 부품을 모두 자체 기술로 개발하고, 디자인과 성능에서도 업계를 선도했다. 드론 한 대에 수십 개의 자사 특허가 적용됐다. 그 결과 DJI는 글로벌 드론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DJI 덕분에 중국이 세계 최고의 드론 국가가 됐다는 말도 허언이 아니다. DJI의 성공에 고무된 젊은이들은 제각기 창의적인 기술을 들고 드론 업체 창업에 나섰다. 2015년에는 무려 400여 개의 드론 스타트업이 창업했다.
중국 정부의 지원도 DJI 성공 뒷받침
DJI의 성공은 중국 드론 산업 전반에 거대한 파급력을 불러왔다. 2023년 기준 세계 드론 생산량의 94%가 중국에서 나왔다. DJI 같은 선도 기업들이 '두뇌' 역할을 하며 시장을 이끌고 부품 공급사와 중소 제조업체들이 따라가는 일관된 분업 구조도 정착됐다. 드론 관련 부품, 설계, 조립, 소프트웨어(SW) 개발까지 하나의 생태계로 진화한 셈이다. 베이징의 파워비전은 수중 30m까지 잠수하는 방수 드론을, 상하이의 이랜뷰는 60g 초경량 드론에 500만 화소 카메라를 탑재한 제품을 선보였다. 왕타오의 성공은 '중국산=싸구려'라는 오명을 깨뜨리고, 중국을 세계 드론 산업의 개발실로 탈바꿈시켰다.
DJI의 성공에는 리 교수의 창업 지원 외에도 중국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 든든한 힘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선전 시장 정부는 2003년 '통용 항공 비행 관제 조례'를 제정하고 드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관련 지침을 마련한 것도 2009년으로 미국(2014년), 일본(2015년)보다 이르다. '드론의 수도'로 불리는 선전 지방 정부는 지난해 말 드론택시, 드론택배, 셔틀헬기 등과 같은 저고도경제 발전 지원을 정부업무보고에 포함시키면서 '선전시 저고도경제 고품질 발전 지원조치'를 발표했다. 기업당 최대 6000만 위안을 핵심 기술·부품 개발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장조사업체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드론 시장 규모는 2023년 110억 달러에서 2030년에는 548억 달러로 5배 가까이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민간 항공촬영, 재난 대응, 농업, 에너지 설비 점검, 국방 등 응용 분야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어 DJI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드론 굴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차석원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기술 중심의 성장 전략, 사용자 중심의 제품 개발, 그리고 중국식 하드웨어 창업 생태계의 정착은 DJI의 신화를 넘어 중국 기술굴기의 상징이 됐다"며 "리 교수와 왕타오가 함께 만든 이 드론 신화는 후배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선전=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