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對中) 고율 관세 부활 움직임에 중국 수출업체들이 제3국을 경유해 ‘원산지 세탁’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한국과 동남아 국가 등 미국행 물류의 우회 통로로 활용되고 있는 국가들이 원산지 조작 단속을 강화하고 나섰다.
5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중국 상품이 한국·말레이시아·베트남 등을 경유해 미국으로 우회 수출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SNS에는 ‘제3국 환적 전문가’를 자처한 계정들이 원산지 증명서 위조 등을 돕겠다는 광고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로 환적해 동남아 제품으로 위장 통관” “중국산 마루·식기류, 말레이시아 세탁으로 원활한 통관”이라고 홍보한다.
중국 중산시에 소재한 조명 수출업체 바이타이 측은 “관세가 너무 높아 바로 미국에 팔 수 없다”며 “인근 국가로 수출한 뒤 다시 미국으로 넘기면 비용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미국 무역법상 실질적 가공이 이뤄진 국가만이 해당 국가산 제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일부 중국 업체는 말레이시아 등 제3국 항만에 도착한 제품을 현지 컨테이너로 옮기고 포장·라벨을 바꿔 원산지를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원산지 허위표시 적발액은 총 295억원에 달했다. 대부분이 중국산이고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관세청은 당시 “한국이 미국 관세 회피의 우회 통로로 활용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흐름에 동남아 정부들도 대응에 나섰다. 베트남 산업무역부는 수출업체에 원자재·부품의 원산지 검증 강화를 요청했고, 태국 외교통상부도 미국행 물품에 대한 원산지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투자통상산업부는 FT 보도 이후 성명을 내고 “국제 무역질서의 투명성을 해치는 원산지 조작은 중대한 범죄”라며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미 당국과 공조해 엄정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회색지대 관행’이 특히 중소 수출업체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짚었다. 한 중국 소비재 제조업체 대표는 “중국 항구까지는 우리가 책임지고, 이후 수입업자들이 나머지를 처리한다”며 “1㎏당 5위안(약 0.7달러)만 내면 해결된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 측 기업들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아마존 상위 10대 셀러 기업의 한 임원은 “중국 공급업체가 ‘미국 수입자’ 역할을 자처하며 낮은 원가로 관세를 신고하겠다고 했지만, 허위 신고가 우려돼 신뢰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