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용인클러스터는 착공에 6년
대만, 가오슝클러스터는 가동에 4년
‘용인 성공’ 없는 ‘호남 성공’ 불가능
대만 정부의 반만이라도 의지-실력 보여야
흔히 반도체 생산 입지로 ‘전수토인(電水土人·전기-물-땅-인재)’을 꼽는다. 최첨단 반도체 팹 1기를 지으려면 넉넉잡아 100만 넘는 가정이 쓰는 전기, 10만∼20만 가구가 쓰는 물,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부지(인프라 포함), 그리고 대당 수천억 원대 초정밀 장비를 다룰 수 있는 고급 인력 수천 명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반도체 팹은 통상 2∼6개 단위로 짓기 때문에 필요한 ‘전수토인’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이런 까닭에 반도체 입지 조건을 충분히 갖춘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데다 입지가 좋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입지가 나쁘다고 꼭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반도체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 요인은 따로 있다.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에 있는 TSMC 반도체 클러스터가 좋은 예다. 이 클러스터 조성 아이디어가 발표된 것은 2021년 8월. TSMC는 그로부터 불과 4년여 만인 지난해 4분기 최첨단 2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SK하이닉스 용인클러스터의 팹 착공에만 6년이 걸린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가오슝의 입지가 뛰어나서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전기부터 보자. 이곳의 주 전력원은 설비가 이미 노후화 단계에 접어든 화력발전소다. 둘째 물. 가오슝은 가뭄에 매우 취약한 지역으로 연중 강수량도 들쭉날쭉이다. 셋째 땅. TSMC 가오슝 공장의 부지는 원래 석유정제소가 있던 자리로, 토양과 지하수 오염이 심각해서 정화에 최대 3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넷째 인재. 가오슝은 수도 타이베이(臺北)와, 인근 TSMC의 본거지 신주(新竹)에서 250km 이상 떨어져 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인재의 남방한계선’ 너머다.
그런데도 불과 4년여 만에 TSMC의 최첨단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대만 정부와 지자체의 유연한 발상과 엄청난 추진력이다. 몇 가지 사례만 보자.
작년 초 TSMC 직원들의 이주 과정에서 자녀들의 전입과 학교 배정 사이에 시간적 불일치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자 가오슝시 교육 당국은 ‘TSMC 사원증만 가져오면 배정과 추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가오슝시는 TSMC 근처에 유치원부터 고교과정이 모두 포함된 특급 학교를 짓는 중이다. 건립 예산은 일반 학교의 3∼5배. 모두 국비이고 TSMC 직원 자녀들에게는 우선 배정의 혜택이 주어진다. 100% 세금으로 지은 특급 명문교에 대기업 직원 자녀들에게 ‘입학 특혜’를 주는 일이 한국이라면 가능할까.당초 30년이 걸릴 수 있다던 오염 정화는 1년 만에 끝냈다. 가오슝시 정부가 ‘예산 폭탄’을 쏟아붓고,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 밤샘 속도전을 벌인 결과다. 환경영향평가에 걸린 기간은 불과 한 달 반. 한국보다 10배 빠른 속도다.
물 부족 문제는 대만 정부가 67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TSMC 전용 재생수 공장을 지어 해결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2021년 기록적인 가뭄 당시 TSMC 신주 클러스터 등에 물이 부족해지자 농업용수를 끊어버리고 전국적인 규모의 휴경 조치를 단행했던 대만 정부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할지 여부는 구체적인 입지와 선정 이유, 수요 예측을 들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 분명한 점이 있다. 현재 SK는 용인에 메모리 반도체 팹 4기를, 삼성은 역시 용인에 시스템 반도체 팹 6기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관련 구상이 처음 나온 게 SK가 2019년 2월, 삼성이 2023년 3월이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SK조차 지난해 3월 겨우 팹 공사를 위한 첫 삽을 떴다. 전력과 용수 문제는 아직도 지난(至難)한 과제로 남아 있다.
용인은 기존 반도체 클러스터와 가깝고, 고급 인력 확보도 호남에 비해 훨씬 수월하다. 이런 프로젝트조차 성공시키지 못하는 의지와 실력이라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갓 구상 단계인 ‘호남 프로젝트’는 앞으로 갈길이 멀다. 정부는 당장 발등의 불인 ‘용인 프로젝트’부터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대만의 반만이라도 보여줘야 ‘호남 프로젝트’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다. ‘전수토인’은 그다음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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