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서구 ‘K미술 컬렉션’의 역사
1888년 7월 고종, 당시 佛 대통령에게 고려청자 한 쌍 선물
서구권의 ‘中-日 아류’ 인식 바꾼 첫 계기
1910년대부터 유럽에 韓 도자 수집 열풍
박물관에 ‘한국관’ 조성, 英에선 첫 단독 전시… 美 경매 시장서도 인기
여름의 맑은 기운을 풀어낸 듯한 고려청자 한 쌍이 비색(翡色)을 뽐낸다. 지름 18cm 안팎의 두 아담한 대접엔 각각 모란꽃과 앵무새가 은근하게 새겨져 있다. 이는 1888년 7월 조선의 고종이 프랑스 사디 카르노 제3공화국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 ‘청자 모란 넝쿨무늬 꽃모양 대접’과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 최근 개막한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두 대접은 같은 해 5월 카르노 대통령이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기념해 프랑스 대표 공예품인 세브르 도자기 3점을 조선에 보낸 데 대한 답례였다. 프랑스 도자에 감동한 고종은 고려청자 전성기 시절인 12∼13세기 대접 2점을 반화(盤花·꽃과 나무를 보석과 금속으로 장식한 공예품), 역사서와 함께 프랑스로 보냈다.
손명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두 대접은 서양에서 ‘말로만 듣던’ 고려청자의 실체를 공식화한 최초의 사례로 확인된다”며 “해외 박물관과 컬렉터들의 한국 미술품 수집의 출발점이 된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이 청자 한 쌍을 시작으로 서구 사회의 ‘K미술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아류’ 취급받던 고려청자, 서양에서 인정받다
“조선의 국왕께서 보낸 2점의 대접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유물입니다. (…) 또 제가 개인적으로 모은 물품 12점과 바라 씨가 수집한 민속품을 기증합니다. 박물관에 조선을 위한 특별한 진열장을 마련해주길 바랍니다.”
기증 이후 현지에선 두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선물이 오고 간 이듬해인 1889년 3월 11일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모니퇴르 위니베르셀(Le Petit Moniteur Universel)’은 카르노 대통령이 두 대접을 세브르도자박물관에 기증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오늘날 극동의 도자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표본”이라고 희소성을 강조했다. 9월에는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발간하는 잡지도 기증 소식을 보도하며 고려청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플랑시는 그 이후에도 약 5년에 걸쳐 자신이 수집한 한국 도자들을 프랑스 주요 박물관에 보내 관람객과 만나도록 했다. 엄승희 이화여대 도예연구소 연구위원장은 ‘근대전환기 초대 프랑스 주조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도자 외교’란 논문에서 “플랑시의 도자 기증품은 19세기 말 파리의 기메박물관과 세브르박물관에 한국관이 마련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이는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 박물관 내 한국 컬렉션을 구축하거나 한국 도자의 시장 가치를 높이는 흐름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고종의 선물은 서구 학계에서 고려청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당시 서구 열강에서 고려청자는 실물로 보지 못한 채 중국 문헌에서나 접하던 존재였다. 서양인들이 접한 한국 도자는 기껏해야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생활 용기가 다수였다.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중국이나 일본 도자의 아류’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고종의 선물이 세간에 알려진 뒤 기류가 바뀌었다. 영국의 중국 도자 전문가 스티븐 부셸(1844∼1908)은 저서 ‘오리엔탈 세라믹 아트’(1896년)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받은 두 점의 고려청자는 중국 자기와 동등한 수준의 품질을 가진 한국 도자가 실존한다는 걸 증명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중국 사서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비색’이란 단어는 고려청자의 색을 가리키는 것”이라며 “가난한 나라의 오래된 물건 중에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평했다.
김윤정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는 “고려청자의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청나라 도자사 문헌 ‘고려요(高麗窯)’ 속 고려청자 기록은 서구 학자들에게 믿기 힘든 자료였다”며 “하지만 1910년대 고려청자 실물 컬렉션이 형성되자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 청자와 고려청자 간 비교사적 연구가 이뤄짐에 따라 고려청자만의 형태나 유색 등 조형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이는 서양의 수집 의지를 자극했다”고 강조했다.
● 20세기 들어 한국 도자 수집·연구 붐
당대 서구에서 원하던 한국 도자는 무엇보다 “오래된 도자, 즉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고려청자는 그중에서도 조형적 우수성과 역사성에 비해 가격이 합리적인 물건으로 주목받았다. 조선에 머문 미국인 외교관 겸 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이 1907년 약 80점 규모의 고려 도자 컬렉션을 한 미국인 수집가에게 매도한 가격은 3000달러에 불과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시아 여행 열풍이 불자,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필수 기념품’이자 재테크 수단으로 한국 미술품을 사 가기도 했다. 조선의 허술한 문화유산 관리 제도 탓에 주로 무덤 도굴품 또는 몰락 양반이 남긴 물품을 매입하는 방식이 다수였다.
영국인 오브리 르 블론드와 그의 부인은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도자를 사 모은 외국인으로 꼽힌다. 논문 ‘아카이브를 통해서 본 근대기 영국의 한국 도자 수집’(최효진)에 따르면 이 부부는 고려청자 등 아직은 저렴한 가격이지만 향후 시장 가치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옛 한국 도자들을 사들였다. 두 사람의 수집품이 외부에 공개된 건 1914년 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박물관(V&A)에 이를 기증하면서였다. 그해 열린 ‘르 블론드 한국 도자 소장품’전은 중국이나 일본 미술품의 일부로서가 아닌, 한국 도자만을 앞세운 영국 최초의 전시였다.
르 블론드 컬렉션은 유럽에서 한국 도자 연구의 발판이 됐다는 의의가 있다. V&A는 두 사람의 기증품을 토대로 1918년에 도록을 발간하는데, 유럽에서 한국 도자를 다룬 첫 전문 서적으로 평가받는다. 최효진 국가유산진흥원 헤리티지미디어팀 대리는 “과거 중국 도자의 일부로 오인되거나 미지의 민속품으로 취급되던 한국 도자를 영국 사회에 예술품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이후 한국 미술품을 쥔 고미술상들은 미국으로 향했다. 1910, 20년대 ‘아메리칸 아트 어소시에이션(AAS)’ 등 경매 시장에 도자기와 집기류를 비롯한 한국 미술품이 줄줄이 출품됐다. 장해림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은 논문 ‘20세기 초 한국미술품의 미국 경매’에서 “당시 경매는 뉴욕이나 보스턴 등 대도시에서 한국의 시각문화를 알릴 기회이자 서양인이 ‘미지의 지역’ 한국을 체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며 “구미권 전역으로 팔려나 간 미술품은 오늘날까지도 해외 박물관, 미술관 내 한국 컬렉션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도 고려청자는 인기 품목으로 꼽혔다. 장 전 연구원은 “20세기 초 해외 컬렉터들은 미국의 일본미술 전문가인 어니스트 페놀로사(1853∼1908)가 정립한 동양미술 평론에 의존했다”며 “페놀로사는 한국 미술품 가운데 고려청자와 불화를 콕 집어 우수하다고 언급했고, 그 영향으로 매사추세츠주 보스턴미술관 등이 고려시대 미술품을 다수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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