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박자에 열차 달리고, 추억의 자리에 마음 앉는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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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서산(충남) 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해 질 무렵보다 더 낭만적인 시간은 하루가 막 시작되려는 새벽이다. 서울역 플랫폼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 설렌 표정이다. 오늘은 기차를 탄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 이름부터가 마음을 간질이는 이 열차는 과거로 가는 문이다. 103년 전통의 장항선을 따라 1960~1980년대 감성이 짙게 깃든 철길을 달리며 충남의 일곱 고장을 순례한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 안에선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출발은 오전 7시 13분. 영등포, 수원, 평택, 천안을 차례로 지나며 열차는 점점 ‘과거’를 향해 달린다. 차창 너머 아파트 숲이 논밭으로 바뀔 때쯤 열차 안 풍경도 함께 바뀐다. 흑백 교복 차림의 청년이 기타를 들고 선다. “옛날엔 말이야…” 중년 남성들의 입담이 여기저기서 피어난다. 딱지치기에, 아코디언 연주에, 추억의 간식에 사람들이 웃는다. 도시락 냄새보다 진한 건 기억의 향이다. 열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철로 위를 달리면서도 사람들은 마음속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한 칸마다, 사람마다, 하나씩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칙칙폭폭, 레트로 열차는 기억의 리듬을 달고 달린다. 이 열차에선 누구나 ‘어린 시절의 나’로 되돌아갈 수 있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 안에선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예산에서 만난 붉은 사과 같은 시간

예산역에 내리자 봄바람이 사과꽃향기를 실어 온다. 첫 번째 행선지는 예당호 출렁다리. 국내 최장 길이의 이 다리는 마치 시간을 가로지르는 경계 같다. 걸을수록 출렁이는 건 다리만이 아니다. 누구나 삶에서 한 번쯤 맞닥뜨리는 ‘흔들림’의 순간. 그 위를 담담히 걷는 기분이다. 낮엔 햇살에 반짝이고, 밤엔 무지개 조명이 물 위를 수놓는다. 시간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어 찾은 수덕사는 고요했다. 백제의 숨결을 품은 이 고찰은 단지 오래된 절이 아니다. 흘러간 시간을 붙잡는 공간이다. 고운 석탑 아래 나지막한 풍경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쁘게 살아온 스스로에게 ‘쉼’이라는 선문답을 건넨다. 대웅전 앞에서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기차는 달리지만 여행자는 멈춘다. 그 지점이 여행의 진짜 목적지일지 모른다.

충남 예산 예당호출렁다리
충남 예산의 은성농원에서는 사과와인은 물론 다양한 발효주와 숙성 와인을 맛볼수 있다.
충남 예산 예산상설시장

은성농원에서는 사과가 와인이 된다. 빨갛게 익은 사과가 발효돼 깊고 진한 풍미로 되살아난다. 누군가의 손길로 빚어진 술은 누군가의 추억을 닮았다. 와이너리 안, 젊은 연인이 사과파이를 굽고, 아이를 안은 부부가 잼을 바른 빵을 나눈다. 중년 여행자들은 잔을 기울이며 말한다. “옛날엔…”. 와인은 지금을 살지만 기억은 늘 시간을 되짚는다.

예산시장에서 마주한 풍경도 인상 깊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오일장에선 정겨운 사투리가 오가고, 돼지국밥집 앞엔 길게 늘어선 줄이 하나의 문화처럼 느껴진다. 백술상회에서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켜는 이들도, 낙원약과를 사며 입꼬리를 올리는 이들도 결국은 그곳에 있는 풍경이 된다.

수선화가 만발한 충남 서산의 유기방가옥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충남 서산의 간월암

수선화 가득한 서산의 봄을 줍다

다음날 아침, 서산의 유기방가옥. 봄은 이곳에서 노란 수선화로 피었다. 2만 평의 꽃밭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화폭이다. 대나무 대신 심었다는 수선화는 수십 년 세월을 이겨낸 노인의 손끝에서 피어난 봄이다. 대문 옆 정자에 앉아 있는 노부부는 수선화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이게 진짜 봄이지.” 짧은 말 한마디에 계절이 머무는 듯하다.

간월암은 달빛과 밀물 사이에 자리한 고요한 암자다.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 암자는 지금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하다. 간조와 만조가 만든 자연의 시계 속에서 시간은 잠시 숨을 고른다. 스님처럼 말없이 앉아 바다를 보는 사람들. 저마다 달을 본다. 누군가는 그리운 얼굴을, 누군가는 자신의 내면을.

마지막으로 찾은 해미읍성은 ‘지켜낸 공간’이다. 병마절도사가 있던 조선의 군사 중심지, 천주교 박해의 아픔까지. 돌담 사이에 스며든 사연은 깊고도 무겁다. 그러나 동시에 굳건하다. 역사는 흘러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봄날의 햇살 아래, 읍성의 그림자조차 아름답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덜컹덜컹’ 기차라는 공간의 특별함

왜 사람들은 기차에 마음을 뺏길까. 비행기보다 느리고, 자동차보다 복잡한 기차에. 그건 어쩌면 ‘기차는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 유일한 이동수단’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미 깔린 철로를 따라 이미 정해진 리듬으로 달린다. 그래서 편안하다. 삶이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 흔들릴 때 우리는 기차를 탄다.

기차는 두 도시를 잇는 것이 아니라 두 감정을 잇는다. 지금과 과거, 현실과 기억, 그리고 나와 너 사이를 천천히 메워간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는 단순한 여행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잇고 시간을 넘는 정취다. 그 안에는 슬며시 흘러나오는 통기타의 선율, 옆자리 여행자의 미소, 그리고 열차 특유의 규칙적인 흔들림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낭만에 빠뜨리는 진짜 기차의 힘이다. 서울로 향하는 열차 안, 로컬 재료로 만든 추억의 도시락을 먹는다. 옆자리의 노부부가 도시락을 나누며 말한다. “이 맛, 진짜 오랜만이야.” 한 칸 건너의 아이는 딱지를 들고 재잘거린다. 누군가는 첫 기차 여행이고, 누군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리듬에 실려 있다.

봄날, 충남으로 향한 이 여정은 단지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고, 사람을 보고, 나를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다. 낭만이란 멀리 있지 않다. 옛 기억을 되살려 오늘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는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되돌아보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에선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간식들이 여행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여행메모

한국관광공사와 코레일, 충남 7개 시군이 함께 운영하는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는 11월까지 총 8회 운행한다. 1960~80년대 감성을 담은 기차 안 공연과 복고 체험, 지역 시티투어가 포함된 당일 또는 1박2일 여행 상품. 장항선을 따라 충남 예산, 서산, 홍성, 보령, 서천, 태안, 아산 등 주요 지역을 둘러보는 코스다. 한국관광공사 심홍용 대전충남지사장은 “이번 상품을 통해 충청남도 서해안 관광자원의 매력을 널리 알릴 것”이라며 “앞으로도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특색있는 여행 상품 개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충남 예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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