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관세) 조치는 경제 혁명이며, 우리는 이길 것이다. 버텨라. 쉽진 않겠지만 결과는 역사적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5일 SNS에 올린 글이다. 당시 펭귄이 사는 허드 맥도널드 제도에도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을 때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뉴욕증시와 미 국채 가격, 달러 가치가 동반 급락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유럽연합(EU)에 이어 한국과의 관세협상을 타결하고 31일(현지시간) 각국의 상호관세율을 정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관세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 ‘트럼프 관세’ 수용한 세계
당초 우려와 달리 관세가 보복관세를 낳고 보복관세가 다시 더 높은 관세를 부르는 악순환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상대인 중국이 보복관세를 물리는 등 반발했지만 미국과의 협상 결과 30% 관세를 받아들이면서 미·중 관세전쟁은 ‘휴전’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EU와 캐나다가 보복관세를 거론했지만 미국과의 정면 대결은 피하는 분위기다. 대부분 국가는 보복관세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린다. 10%나 15% 상호관세율은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경제학자는 최근 SNS에 “어떤 이유로 EU가 15%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이 보이는지 모르겠다”며 “EU가 너무 약해서 이게 최선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상황이냐”는 글을 올렸다.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기존 무역체제는 순식간에 효력을 상실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도 사실상 휴지조각이 됐다. 원래대로라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빗발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주요국 중 실제로 그런 나라는 없다. 워싱턴DC의 한 변호사는 “미국에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데, 지금은 특별한 시기”라고 평가했다.
◇ ‘정치 무기’로 관세 활용 성공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정치 무기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며 50% 관세를 매기고, 태국과 캄보디아 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고율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위협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자 관세를 물리겠다고 경고했다. 과거에는 상대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내정간섭이라거나 법적 근거가 부족한 정책이라는 저항에 부딪혔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트럼프는 언제나 물러선다’(TACO)는 오명을 얻었지만 적절한 수준의 TACO는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은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돈 내고 관세 인하하는 걸 허용하겠다”고까지 했고, 실제 일본 EU 한국 등 주요 대미 흑자국을 상대로 ‘성과’를 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로부터는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등 예견된 부작용은 아직까지 크지 않다. 이는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을 염두에 두고 통화정책을 결정해 온 미국 중앙은행(Fed)의 입장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7%로 올랐지만, 시장이 우려한 것에 비하면 상승 폭이 작았다.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3.0% 증가(전기 대비 연율 기준)해 시장 추정치(2.5%)를 뛰어넘었다.
◇ 미국에 대한 불신 커질 수도
물론 아직 관세전쟁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시장에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서슬에 가격 상승 수요가 짓눌려 있을 뿐, 언젠가는 소비를 위축시키고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듯 동맹국에 대대적인 대미 투자를 강요함으로써 제조업을 살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일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입맛에 맞추는 시늉은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에 대한 판단이 투자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미국이 치러야 할 가장 큰 비용은 미국을 향한 신뢰가 사라진 점이다. 판을 마구 흔들어 원하는 것을 챙겼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는 미국의 태도는 동맹국에 미국이 더 이상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불안감을 심어줬다. EU는 일본이 주도하는 포괄적·점진적 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남미·동남아시아·아프리카 등에서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