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말하는 데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의 말하기는 공간을 구축하는 일과 같아진다. 형태가 지닌 움직임에 대한 영감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진입 공간, 강제성이 배제된 자연스러운 움직임, 정신의 자유로운 움직임마저 품어낼 수 있는 완결된 동시에 텅 빈 그 무엇.
프루스트는 그런 공간 중 가장 견고한 것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 부동성 속에 유동성까지 품어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말했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미각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그 감각의 표면 위에서 그가 읽어낸 모든 것들을 문학의 형태로 번역했다. 그렇기에 그 넓은 공간에 다가서기 위한 일종의 진입 공간인 마들렌은 끝없이 재창조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소설의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지만 그가 말하려 한 것은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던 1910년, 프루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시간 속에 있다고 여기면 잘못일세. 우리의 중요한 부분은 시간 밖에 있다네.” (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2020))
어머니의 저녁 인사에 대한 기억밖에 없던 그는 홍차에 찍어 먹은 프티트 마들렌의 맛이, 물을 흡수하며 온갖 모양으로 변화하는 일본의 종이 공예처럼 그의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을 길어 올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미각이 들려주는 것은 자신이 잃어버렸지만 분명 존재했었던 그 시간들에 대한 증언이며 그것을 단지 되찾을 뿐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012))
그렇게 해서 그가 창조한 것은 콩브레라는 하나의 공간이다. 그는 이 공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말하며 그 구축 과정이 끝날 때 즈음 또 다른 상징적 공간이 등장한다. 그것은 스완네 집 쪽으로 연결되는 산책로와 게르망트 쪽으로 연결되는 산책로다. 하지만 이 공간 또한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문학에 대한 열망이며 그 근원을 다시 창조하는 과정이 진정한 문학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내 생각에 이 스완네 집 쪽으로 연결되는 산책로는 프루스트에게 문학의 길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그는 이 산책로를 기복이 심하고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지평선 같은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한다. 자신을 예술의 세계로 이끌어 준 스완씨네로 연결되는 길이며 첫사랑인 스완양과 조우하게 되는 길이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던 길이다. 그는 의식 속에서 이곳을 반복해서 걸으며 그곳에서 느낀 모든 감각의 표면을 번역하고 재창조하여 불멸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작가 존 버거는 많은 번역 작업이 최상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번역은 두 언어들 사이의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짓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씌어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이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2019))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을 번역하는 일은 사각 관계여야 한다. 먼저 공간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것(건축가의 의도와 삶)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것이 형태로 발현되는 과정, 그 형태가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원리를 이해해야 하며 그 다음에야 그것의 번역 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언젠가 첩첩산중에 있는 건축물에 고립된 남자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당시 합평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갇히는 공간을 스케치하며 구상하고 모든 동선을 설정한 후 썼음에도 이런 피드백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공간인지 모르겠어요." 그 이후 그 단락을 수십 번을 고쳐 썼지만 여전히 내가 상상한 그 공간을 정확히 번역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남자를 그곳에 가두려 했던 것에는 단순한 아이디어로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발아되는 순간만을 기다려온 씨앗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프루스트가 콩브레라는 공간을 재구축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것처럼 나 또한 그 근원을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내 공간적 경험의 콩브레를 찾아서
어린 시절의 선택은 대게 x축을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이쪽과 저쪽, 좌뇌와 우뇌, 문과와 이과. 내가 대학 시절 가장 좋아하던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건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원통형의 아트리움에 들어섰고, 자료실에 올라가면 또 한 번 x축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했는데 카운터 앞에서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 내가 읽고 싶었던 소설책들이 있었고, 좌측으로 가면 읽을 수밖에 없었던 건축을 비롯한 여러 디자인 서적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순간은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것에 관한 반항심이 올라올 때였고 왼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은 수업 시간 내내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때였다. 난 르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프랑스의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교수님을 상상했고, 매스, 보이드와 솔리드, 허공 덩어리 같은 단어가 나오면 건축과 공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세계는 접근 불가한 벽 뒤로 들어가 꽁꽁 숨어 버렸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서가에서 미학 이론서나 건축 서적을 죄다 꺼내서는 펼쳐놓고 뒤적거리곤 했다.
그러다 문고본 크기의 서적에서 그 사진을 발견했다. 텍스트가 더 많았던 그 책은 내게 의문과 불가해함을 더 많이 남겼지만, 그 책의 문장들은 일종의 번역가인 것처럼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기 이전의 것을 내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번역해 주고 있었다.
처음 그 사진에서 느낀 것은 아주 단순한 의문이었다. 이게 실제 하는 곳일까? 내게 그런 공간은 오로지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했다. 미래, 하지만 상상으로 그려낸 미래.
책에는 그 공간에 대한 설명도 이름도 없었다. 공간의 핵심은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뚫려있는 텅 빈 영역, 그 원형의 보이드였다. 그 원은 단순한 방식으로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담아내는 하나의 창이었다. 또 그 안에는 수많은 서가와 열린 부분의 끝에 올려진 책 한 권이 있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그곳을 거닐고 책을 꺼내어 이 공간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을 테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 되었다. 그런데 어떠한 꿈이 접근 불가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허용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상상하게 되기 마련이다.
마치 그 만질 수 없는 감정의 형태를 매일 머릿속 한구석에서 꺼내어서는 손으로 조몰락거리며 어떠한 형태의 종국으로 탈바꿈시키려다가 내게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절망하고서는, 그것이 주는 쾌락 때문에 자꾸만 건드려 영원히 아물지 않는 어떤 흉터로 남기고 싶은 미묘한 충동을 느끼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경이와 황홀경이 단지 그 열망의 대상에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덧댄 상상력에 의해 증폭된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이 기쁨의 물줄기를 더 강렬하게 만들고 최초의 대상을 더욱더 접근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 넣어 아련한 열망의 크기만을 계속해서 키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공간에 대한 경험이 시작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공간의 이름은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이었고, 건축가의 이름은 루이스 칸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본 그 책(존 로벨 『침묵과 빛』(2005))은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있다.
건축의 예술성은 그것의 유동성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부동성에서 나오는 것일까? 건축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장소와 그것을 이루는 물성에 주목한다면 부동성의 예술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들어섰을 때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 진입 공간의 이끌림,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형성,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간의 시각적 리듬감에 주목한다면 건축은 음악, 문학과 같은 유동성의 예술에 가깝다.
공기 중에서 잠시 부르르 떨다가 소멸하는 음들이 우리에게 남긴 인상이 바로 음악이란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듯, 수려한 문장이 아니라 그것들이 잊혀진 후에야 발견되는 눈앞에 흐르는 삶에 덧대어지는 그 구조적 이미지가 진정으로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듯, 건축을 유동성의 예술로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것의 단편적인 복제에 불과한 이미지보다는 그 공간의 경험을 내밀하게 기록한 텍스트를 통해서도 더 생생한 경험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난 이 공간을 아직도 방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보고 싶었다. 칸이라는 인물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서 출발하여 다른 이의 저작물 속에서 역으로 공간을 번역해 내는 경험을 시도해 보고 싶어졌다.
텍스트로 공간을 읽어내는 일
이 책(웬디 레서 『루이스 칸: 벽돌에 말을 걸다』(2024))의 첫 번째 챕터 제목은 '마지막’이다. 저자는 루이스 칸을 한계치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을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여기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의 심장이 멈춘 곳은 그가 전 세계에서 일정을 소화하다가 그의 근원인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던 뉴욕의 펜 역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은 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초로 제시된다.
비선형적 스토리텔링은 시간이라는 축을 따르지 않을 뿐 거기에는 더 강렬한 하나의 축이 있어야 한다. 이 마지막 챕터는 조너스 소크가 칸의 추도식에서 낭독한 시와 함께 끝맺음 되고 그 이후에 소크 생물학 연구소를 방문한 저자의 경험기가 이어진다. 또 '성장’ 챕터 뒤에는 그 성장이 가장 중요한 공간적 가치인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이 등장하는 식이다. 이렇듯 이 책은 시간이라는 선을 따르지 않으나 그 구성에 명확한 하나의 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칸의 마지막 순간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진입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경험한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은 이미지를 통해 상상했던 곳과 달랐다. 내가 본 것은 그 중심의 아트리움뿐이었다. 저자는 이 대칭성과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가진 아트리움이 이곳을 대표하긴 하나 공간 구석구석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숨겨놓은 비대칭성과 복잡성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아트리움으로 다가가 자신의 위치를 단번에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칸은 대단한 애독가였으며 도서관을 설계할 때는 도서관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하며 책을 가진 사람은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고 도서관은 그렇게 시작된다고 말했다.
때때로 어떤 책은 우리가 길을 잃게 만든다. 그 잃음 속에서 빛이 스며들어오는 정신적 공간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과 즐거움을 얻게 되며 그것이 바로 성장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도서관은 이 성장이라는 시간 선상의 움직임마저 품어내야 한다. 그 형태는 그러한 정신적 움직임마저 품어내려 했던 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텍스트를 통해 이 공간의 다른 얼굴을 마주하며 공간을 번역하기 위한 네 개의 기둥은 점차 모습을 갖춰갔지만 여전히 이곳을 실제로 거닐고자 하는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 욕구는 어떤 정신적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 움직임 속에서 또 한 번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은 정신이 언제나 빛으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아주 적막한 곳으로 향한다. 즉 침묵을 향하기도 한다. 처음 내게 루이스 칸을 알게 해준 책의 제목은 '침묵과 빛'이었다. 그렇다. 빛이 아니라 침묵이 먼저다. 그리고 그 공간은 언제나 내게 접근 가능한 곳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 다가설 때만이, 사라졌던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마저 맑은 수면 위에 끄트머리를 담근 종이 공예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