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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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시집

‘마당 한 켠 온 가족 이발하는 날은 우리 집 연례행사 하는 날, 온종일 머리카락 흩날리고 모두들 똑같은 머리 모양에 한바탕 웃음이 팝콘처럼 터졌다. 세월에 무뎌진 가위처럼 당신 가위로도 가르지 못한, 깊고 푸른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흰머리 손질해 드리다 사랑이 묻어있는 당신의 가위, 한참이나 붙들고 있었네.’

2022년 서울시 시민공모작으로 당선된 이유진의 ‘어머니의 가위’라는 시다. 이 시는 서울 지하철 5호선 청구역 승강장 안전문에서 볼 수 있다. 서울지하철에는 이 작품을 낸 이씨 같은 평범한 시민이 쓴 200여 편의 시가 승강장 안전문마다 새겨져 있다.

오래전 승강장 벽 곳곳에는 명시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 시선은 늘 벽을 등진 채 플랫폼을 향해 있었다. 2008년 승강장 안전문 설치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서울시에서 이 차가운 철골 구조물에 시가 흐르게 하자는 구상을 제안해왔다. 추락과 투신 사고를 막기 위한 보호벽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시집을 만드는 일이 시작됐다. ‘기대지 마세요’ 같은 경고문과 광고가 차지하고 있던 유리 벽에 시가 하나둘 자리를 잡아갔다.

처음에는 유명 시인의 작품만 걸리다가 이듬해 무명 시인들도 시를 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호응에 힘입어 2011년에는 공모를 통해 시민도 자신의 시를 내보일 수 있게 됐다. 마음속에 시를 품고 살아온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첫 공모에 무려 1500여 편의 시가 쏟아졌다. 얼마 전부터는 각국 주한 대사관의 추천을 받은 해외 유명 시도 만날 수 있게 돼 지하철 속 시의 세계가 더 다채롭게 채워졌다.

예전에는 시를 잘 몰랐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외우고 해석하는 것이 전부였지 마음으로 느끼기엔 늘 한 발쯤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이육사의 ‘청포도’를 만났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문구 하나하나에 마음이 물결쳤다. 맑고도 청아한 심상 너머에 응축된 결연한 의지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시는 삶의 어느 조각을 조용히 비추는 창, 잊고 있던 감정을 건드리는 손길이 됐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문득 눈에 들어온 한 편의 시. 시민들은 시와 공명한 찰나의 순간을 사진에 담고 짧은 소회를 얹어 SNS에 나눴다. 소박한 기록들은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번지며 하루의 빈틈을 메웠다. 지금도 그 시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희망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명대사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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