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시아 주요국의 달러 예금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하 속도에 따라 달러 예금이 글로벌 금융 시장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 외화예금 1조 달러 돌파
5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최근 아시아 각국에서 기업과 가계의 달러 예금이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지난 6월 말 은행권 외화예금(달러 등)이 약 1조 200억 달러에 달했다. 2022년 3월 이후 최고치다. 올 상반기에만 1655억 달러가 순증하며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대 반기 증가 폭을 나타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약 20% 정도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중국인민은행(PBOC)은 달러 예금을 억제하고 위안화 환전 유인을 높이기 위해 시중은행들에 달러 예금 금리 인하를 지시하기도 했다.
대만의 경우에는 기업과 가계 외화 예금은 올 5월 말 기준 4712억 달러로 집계됐다. 전년 동월 대비 3.5%로 감소한 수치다. 하지만 역대 최고치에 근접했다. 5월 한때 타이완 달러가 7% 가까이 급격히 절상된 탓에 환산 예금액은 줄었지만 달러 기준으로는 전월보다 98억 달러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만 중앙은행의 매도 한도 규제로 대만 기업은 벌어들인 미국 달러를마음껏 팔지 못하고 예금으로 쌓아둔 영향도 있다. 외환 당국은 급격한 환율 변동을 막기 위해 하루 달러 매도량을 제한하면서 달러 예금 누적을 유도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경우에도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달러 자산을 축적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올 3월 말 기준 네 나라의 외화예금 합계가 622억 달러에 달해 사상 최고치에 육박했다. 말레이시아의 외화예금 잔액은 전체 예금의 10.6%에 달하며 최근 5년 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외화 예금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6월 말 기준 국내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1064.4억 달러로 전월 대비 50.8억 달러 늘었다. 두 달 연속 증가세다. 1년 전(905.7억 달러)과 비교하면 약 17.5% 증가한 수치다.
통화별로 보면 달러화 예금이 전월 대비 36억 달러 증가했다. 위안화 예금(+11억 달러)과 엔화 예금(+2.6억 달러)도 해외 현지법인의 국내 모회사 배당금 일시 예치 등으로 함께 늘었다. 주체별로는 기업 예금이 46억6000만 달러, 개인 예금이 4억2000만 달러 각각 증가해 전체 외화 예금 상승을 견인했다.
글로벌 경제 영향 줄까
최근 급증한 아시아 지역의 달러 예금은 미국 중앙은행(Fed) 금리 정책에 따라 글로벌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미국 고용지표가 갑자기 악화하면서 Fed가 9월 기준금리를 낮출 것이라는 예상이 84%까지 올라갔다. 연내에 적어도 두 번 이상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에도 힘이 실렸다.
Fed가 기준 금리를 인하하면 미국과 아시아 간 금리 격차 축소된다. 달러화 가치의 하락과 아시아 통화의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Fed가 금리를 인하하면 달러 자산 수익률의 매력이 감소하고, 기업과 가계는 보유한 달러를 자국 통화로 환전하려는 유인이 커지게 된다. 달러 예금의 환전(달러 매도)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앞서 Fed의 기준 금리 인하 전망이 나왔던 5월 초에 대만과 한국 기업은 달러를 매도해 현지 통화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분석도 있다. Fed의 기준 금리 정책 전환 기대가 커지면 아시아 수출업체들의 달러 매도 심리도 확산할 수도 있다. '달러 약세와 현지 통화 강세'라는 방향성이 분명해지면 투기적 자금까지 가세할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의 투자은행 나틱시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게리 응은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미국 달러 자산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약해지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시장 변동성 확대다. 달러 자산을 대량 보유한 기업·금융기관이 일시에 자국 통화로 환전을 시도하면 특정 통화의 일일 변동 폭이 커질 수 있다. 실제 지난 5월 대만 달러는 이틀간 10% 가까이 폭등하며 1988년 이후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오버시즈차이니스뱅킹코퍼레이션(OCBC)의 선임 외환 전략가 크리스토퍼 웡은 "달러 약세 추세가 가속할 경우 수출업체들이 달러 보유분을 급히 매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현지 통화 강세가 과도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Fed의 금리 인하 속도가 관건
아시아에서 달러 예금이 대규모로 환전될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의 파급 효과는 여러 시나리오로 예상할 수 있다. 우선 Fed가 천천히 금리를 인하하면 아시아 수출기업이 단계적으로 달러를 환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달러인덱스(달러 가치)는 서서히 하락한다. 아시아 통화들은 완만히 추가 절상(가치 상승)될 것이다.
달러 매도 규모가 시장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미국 국채 등 달러 자산 가격에 큰 충격은 없고, 금리 스프레드(미국과 아시아 금리차)도 안정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 각국 중앙은행도 급격한 개입 없이 자연스러운 외환시장 균형 재조정을 용인할 가능성이 높다.
Fed의 빠른 금리 인하 신호로 아시아에서 달러 환전 속도가 빨라질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수출업체와 기관투자가들이 앞다퉈 달러를 팔아 현지 통화를 매입하면 달러인덱스는 단기간 급락하기 쉽다. 안전 자산 선호가 약화하면서 미 국채 금리가 급등(국채 가격 급락)할 수 있다. 반대로 Fed의 강력한 금리 완화 기대에 만기 2년 이하의 단기 금리는 급락하는 등 금리 스프레드(두 금리 간 차이)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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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