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1번, 단 10분 면회 위해...이희호는 ‘암호문’ 같은 메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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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1번, 단 10분 면회 위해...이희호는 ‘암호문’ 같은 메모를 썼다

입력 : 2026.05.14 17:54

옥중 김대중 지킨 이희호 여사
미공개 기록 엮어 책으로 출간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장(왼쪽)과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14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출간한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장(왼쪽)과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14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출간한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유가 연내 10% 인상 방침(사우디). 전기료도 6% 올려. 32개의 중화학업체 73~81년. 차관도입 32억- 갚은 것은 9억. (...)유럽 반핵 시위- 반미로 번져. 대학가 시위 심각’

1981년 12월 19일. A4 용지 한 장 정도 크기의 종이에 한국을 넘어 해외 정치·경제 상황을 단편적으로 적은 글귀들이 적혀있다. 언뜻 암호문처럼 해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메모의 최종 독자는 한 사람이었다. 1980년 신군부의 기획으로 내란 음모 혐의를 받고 수감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의 반려자 이희호 여사가 한달에 한번, 10분 남짓 주어진 면회 시간에 남편을 위해 바깥 소식을 빠르게 전하기 위해 메모를 준비해간 것이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감옥 안팎에서 남기거나 주고받았던 기록과 편지, 국제 구명활동 자료 등을 엮은 책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을 14일 출간했다. 유신 체제였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투옥됐던 1982년까지 남겨진 기록을 집대성했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은 이날 도서관 내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수감 시기 기록을 조사하면 할 수록 이희호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며 “수감 생활 뒷바라지 뿐 아니라 모든 연락 창구를 맡아 민주화 운동과 국제 연대 등 모든 영역에서 동반자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책에는 이희호 여사가 남긴 편지와 메모, 정부에 대한 신청서와 건의서 등 총 20건의 문서가 새롭게 공개됐다. 유신 당시 중앙정보부 납치, 가택 연금, 구속을 겪은 남편의 고난을 생생히 기록한 ‘서독 인권단체에 김대중의 고통을 알리는 글’은 이희호 여사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남편의 해외 구명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군부에 의해 투옥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해 국내·해외 소식을 ‘다이제스트’식으로 정리한 8건의 메모도 책에 실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1982년 이희호 여사가 남편에게 외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준비해둔 메모.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1982년 이희호 여사가 남편에게 외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준비해둔 메모.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남편의 고통을 보다 못해 정부 당국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도 가득하다. 이희호 여사가 3.1민주구국선언 이후 서울대병원 감옥병실에 감금된 남편의 교도소 이감을 위해 서울구치소장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경우다. 운동도 허용되지 않고, 면회도 아내밖에는 불허된 지옥같은 환경에 몸부림치는 남편을 대신해 이희호는 펜을 들었다. “운동부족과 일광부족으로 인하여 육체적·정신적 고통만 가중되고 있어 속히 환소조치하여 주시옵기를 수형자의 의사에 따라 정식 서자(書字)로 신청합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인동초’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내에게 고초를 호소했다는 사실도 책에 등장한다. 이희호 여사가 면회 당시 남편의 말을 그대로 메모한 것이다. “비로소 하는 말이지만 그간 자포자기하여 발광 직전까지도 간 적이 있다. (중략) 내 일생 이토록 치욕스럽고 괴로웠던 적이 없다. 자다가도 숨이 탁 막히며 치밀어 올라 못 견딜 지경이면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극복하곤 했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어머니(이희호)는 결혼했을 때 아버지를 단순히 남편이 아닌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의 목적을 위해 함께 나아가지는 동지라고 생각했다”며 “고난이 와도 굴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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