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LG아트센터 |
"어떤 분들은 헤다 안에 '금자'도 있고, '장금이'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헤다의 고뇌, 외로움, 처절함을 더 그리고 싶었어요."
아름답고 당당하며 자유를 쫓는 헤다 가블러는 이영애 그 자체와도 닮아있었으며, 그의 캐릭터 집약체이기도 했다. 이영애가 데뷔 35년 만에 처음으로 도전한 대형 연극 '헤다 가블러'는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영애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도전적이고 총명하거나 파괴적인 데서 카타르시스를 주는 캐릭터가 많았다. '공동경비구역 JSA' 소피.E.장 소령, '봄날은 간다' 한은수, '친절한 금자씨' 이금자, '대장금' 의녀 서장금, '사임당, 빛의 일기' 신사임당, '구경이' 경찰 구경이, '마에스트라' 지휘자 차세음 등. 이번 연극 '헤다 가블러' 헤다도 어영부영 결혼은 했지만, 오히려 120년 전 당대의 케케묵고 억압된 여성상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 파괴적인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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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의 대사 중에 '지루하니까!'란 말처럼, 전형적인 이영애의 이미지에선 연기가 지루하지 않겠어요? 제가 어디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겠어요."
LG아트센터가 개관 25주년을 맞아 제작한 연극 '헤다 가블러'는 지난 7일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개막했다. 배우 이영애를 비롯해 김정호, 지현준, 이승주, 백지원, 이정미, 조어진 등 총 7명의 배우들이 캐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헤다 가블러'의 배우들은 6월 8일까지 '원 캐스트'로 관객들을 만난다.
'헤다 가블러'는 입센의 고전을 미니멀한 무대와 대형 스크린 등을 활용해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한 공연이다. 이번 공연은 영국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의 베스트 감독상, 베스트 리바이벌상(2006) 수상자인 리처드 이어(Richard Eyre)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을 바탕으로 했다. 연출은 제54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의 주인공이자, '치밀한 텍스트 분석의 달인'으로 불리는 전인철이 맡아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헤다 가블러' 이야기는 아름답고 당당한 '헤다'가 학문밖에 모르는 연구자 '조지 테스만'과 충동적으로 결혼 후, 기대와 달리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시작된다. 그러던 중, 불운한 과거의 연인이자 불운한 천재 작가였던 '에일레트'가 재기에 성공해 나타나고, 그 뒤에 헤다가 무시하던 동문 '테아'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를 깊은 혼란에 빠뜨린다. 한편, 헤다의 심리를 꿰뚫고 은밀하게 통제하려는 '브라크 판사'까지 얽히며, 헤다의 삶은 점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인 '헤다' 역은 이영애, 학문적 성취 외에는 관심이 없는 헤다의 남편 '테스만' 역은 김정호, 가까운 곳에서 끊임없이 헤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오는 판사 '브라크' 역은 지현준, 헤다의 잠들어 있던 욕망을 깨우는 옛 연인 '에일레트' 역은 이승주, 헤다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테아' 역은 백지원,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고모 '테스만' 역은 이정미, 헤다의 하녀 '베르트' 역은 조어진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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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5년 만에 상업 연극 무대에 처음 섰다. 어떤 이유로 연극을 하게 됐는지.
▶제가 몇 십년 만에 처음 공연하는 것이다 보니 아쉬움이 있더라도 잘 봐주셨길 바란다. 사실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워크숍으로 연극을 했는데 상업 연극은 처음했다. 제가 데뷔 때 소극장에서 연극을 했었고 그때 연극을 하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와 드라마에 집중하고 결혼하고 아기에 집중하다 보니 연극을 못 했다. 그러다가 대학원 은사님이 입센 작품을 번역한 자리가 있었는데 저에게 헤다란 역을 해봐줄 것을 제안 주셨다. 헤다를 통해 여러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하시더라. '벚꽃동산'을 보면서 이런 무대에 서보고 싶단 생각도 하게 됐다. 제가 KBS 2TV 드라마 '은수좋은 날' 촬영을 마치고 이 작품을 하고 싶더라. '헤다 가블러' 초연 날짜가 제 생일인 1월 31일이더라. 혼자서 무언의 '해야 한다'란 이유를 들면서 하게 됐다.
-관객들 앞에서 첫 공연을 한 소감은?
▶무식하면 용감했더라.(웃음) 결정하기까지 고민을 한 달 넘게 했다. 센터장님부터 미팅을 몇 번씩 하고 빈 무대에도 몇 번씩 서보면서 느낌을 가져봤다. 여기까지 오기에 만만치 않은 거리와 가격이 있었을 텐데, 저를 보러, 공연을 보러 와주신 분들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크더라. 첫 공연이라 제가 '대사만 까먹지 말자', '누가 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갖고 연기했다. 조금 더 발전해서 제가 조금 더 즐기는 무대를 하고 싶기도 하다.
-대극장에서 공연을 한 느낌도 남다를 것 같다.
▶쟁쟁한 배우분들과 연출진이 도와주셔서 생각보다 호평이 나온 것 같다. 대극장의 묘미는 큰 오브제가 많지 않냐. 무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미학적인 요소를 감상할 수 있겠다. 저는 매체 연기를 하면서 제 감정을 다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을 무대 위에서 액팅으로 보여드리고 싶다.
-헤다란 인물의 마음은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했는지.
▶무대 위의 오브제인 '풍선'은 날아가고 싶은 헤다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120년 전 결혼제도를 벗어나려는 헤다의 마음으로만 볼 게 아니라, 직장 스트레스 등 넓은 관점에서 봐도 좋을 것 같다. 헤다는 정답이 없을 것 같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만 작품을 보면 해석이 좁아질 수 있겠더라. 요즘 이혼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이지 않냐. 현대 사회에서 갇혀있는 우리의 굴레에서 생각을 해보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을까 싶다. 저는 굳이 생각한다면 '헤다가 굳이 자살을 해야 했을까' 싶었는데,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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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매체 연기와 달리 어떻게 다가오는가.
▶저 또한 대사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NG나면 어쩌지 고민한다. 당연히 무대 위에선 NG 없이 연기를 해야하더라. 그리고 무대 위에선 CF, 영화에서 받는 조명과 또 달리 내 안에 스며드는 감정과 폭의 깊이가 크더라. 그 행복감을 위해서 힘들더라도 도전하는 것이겠다. 많이 배우고 있다. 지난 3월부터 한 달 정도 연습을 했을 때인데, 리허설을 한 녹화 영상을 단톡방에 올려주셨더라. 근데 나만 너무 이상하더라. 그날 밤에 잠을 못 잤다. 액팅하는 친구한테 '연기 좀 가르쳐 달라'고 하기도 했고 연극에 대한 스킬도 배웠다.
-무대 위에서는 편집이 없으니,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 많이 필요했을 텐데.
▶무대 위에서 제가 기침이 나올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속으로 '살려주세요'라면서 연기했다.(웃음) 백지원 배우가 '선배님만의 강점이 있어요. 선배님은 무대 위에서 틀려도 쫄지 않아요'라고 하더라. 내색을 안 하고 휙 지나간다고 하더라. 몇 번 제가 멘탈이 나갈 뻔한 적도 있었는데, 관객 몰래 지나갈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더라. 이제는 무대 위에서의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화장실도 가면 안 되니 공연 3~4시간 전에는 아무것도 못 먹겠더라. 그래서 살이 빠졌나 보다. 앞으로 다이어트가 필요하면 연극을 해야겠다.(웃음)
-앞으로도 연극, 공연을 보여줄 생각이 있는지.
▶힘들지만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당장 연극을 하지 않더라도 배우로서 새로운 걸 계속 찾을 것 같다.
-헤다 가블러는 어떻게 연구했나.
▶나만을 기준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남자도, 여자도 느낄 수 있는 제도권 안의 스트레스로 인물을 이해했다. 그렇지 않으면 헤다의 폭이 좁을 것 같더라.
/사진=LG아트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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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초반이긴 한데, 가족들은 '헤다 가블러'를 본 적이 있는지.
▶이번주에 저희 딸이 공연을 보러 온다고 하더라. 이 공연의 엔딩이 좋은 건 아니어서 딸에게 얘기하니 딸이 '그런 게 있는 게 좋다'라고 하더라. 남편과 아들은 책임감으로 막바지에 올 것 같다. 안 오면 후한이 두려울 테니까.(웃음)
-입센에 대해선 어떻게 이해했나.
▶입센에 대한 성향, 북유럽의 날씨 등에 대해 3일간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입센을 알고 나니 헤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헤다는 가스라이팅 잘 될 수 있는 아바타였고, 날아가고 싶지만 날 수 없는 풍선이라고 이해했다. 헤다는 항상 갈망하는 디오니소스였을 것 같고, 죽음으로 또 다른 해방의 출구를 찾은 것 같다.
-헤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외적으로 또 준비한 게 있다면?
▶머리를 더 붙여볼까 여러 고민을 해보다가 외적인 것을 준비할 겨를이 없더라. 개인적인 약속도 다 취소했다. 맨 처음에 '이거 장난이 아니네'라며 현타가 한번 온 적이 있었다. 오히려 외모 관리를 더 못 하게 됐다. 제가 집이 이태원인데 이태원 밖을 나가지 못했다.
-원캐스트 공연이라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은지.
▶체력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좋다는 건 다 먹고 남들 하는 것처럼 하고 있다.(웃음)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니까 그게 가장 큰 영양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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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러'에 이영애가 아이디어를 낸 부분이 있다면?
▶제가 '보라색 블라우스', '팬츠 스커트'를 입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애매모호한, 누구와 잘 어울릴 수 없는 색깔을 가진 여자라 생각했다. 바지만 입기엔 겁이 많은 여자이고, 치마만 입기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영애가 생각하는 헤다의 장점은?
▶어떤 분들은 여기 안에는 '금자'도 있고, '장금이'도 있다고 하더라. 저는 헤다의 고뇌, 외로움, 처절함을 더 그리고 싶었다.
-이영애가 연기한 캐릭터 결을 보면 '친절한 금자씨', '구경이', '마에스트라'처럼 전형성을 벗어난 캐릭터를 선호하는 것 같다. 이번 헤다도 그렇고.
▶헤다의 대사 중에 '지루하니까!'란 말처럼, 전형적인 이영애의 이미지에선 연기가 지루하지 않겠냐. 제가 어디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겠냐.(웃음)
-스스로 생각하는 이영애의 색깔은?
▶저도 20대 때 보라색을 좋아해서 차도 보라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웃음) 이영애의 색깔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저는 파란색을 좋아한다. 물을 좋아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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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가 스스로 깨고 싶은 욕망은?
▶'헤다 가블러'를 잘 쌓아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평소 리뷰는 찾아보는 편인가.
▶특히 연극이 처음이니 이번엔 많이 찾아보게 되더라. 심리 전문가가 연극을 보고 '헤다 같은 사람이 많다'라고도 하셨더라.
-올해 KBS 2TV 드라마 '은수좋은 날'도 선보인다. 올해 활동을 어떻게 계획할 수 있을까.
▶옛날에 '대장금'이 오늘 촬영하고 내일 방영되는 식이었는데, 저희 때와 달리 OTT가 많아지면서 방영이 나중에 되더라. 빨리 계약을 해야겠단 생각도 들면서 1년 안에 두 편의 작품을 하게 됐는데 저는 좋은 것 같다. 체력이 되면 좋은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
-유튜브 출연도 하면서 활동 방향이 넓어졌다. 앞으로의 활동 방향은?
▶다양하게 일하고 싶다. 가장 중심은 배우이겠지만 재미있게 살고 싶다. 물론 가족 안에서 중심을 잘 잡으면서 다양한 걸 시도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