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관용과 절제” “대인논증 지양” “재판관 다양화”

2 weeks ago 12

18일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전날 한 대학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헌재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데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얘기였다. “설득에는 시간이 걸린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가 있다. 급한 사람이 늦은 사람을 기다려야지, 늦은 사람이 급한 사람을 어떻게 기다리겠나.”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재판관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과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 권한대행은 “통합을 호소해 보자는 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했다.

▷재판관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의견 차가 있었는지 아직 확인된 건 없다. 헌재 안팎에서 야당의 잘못을 결정문에 어느 정도 수위로 넣을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는데 문 권한대행의 강연에도 그렇게 해석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정치권의 관용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는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요구되는 절제는 야당에도 요구된다. 양쪽에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다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느냐”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야당 중 어느 한쪽에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 야당의 잇단 탄핵안 발의 등 일방적 행태를 적시한 것은 그런 논의의 결과로 보인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고 한 대목이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야당 역시 정치적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해 설득력을 높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더디게 가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만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막을 수 있다는 걸 헌재가 보여줬다.

▷문 권한대행이 퇴임사에서 대화와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수용하지만 ‘대인논증(對人論證)’ 같은 비난은 지양하자고 했다. 대인논증이란 사람의 경력이나 사상 등을 문제 삼아 근거 없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태는 재판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일 뿐 아니라 법관들 간의, 법원과 국민 간의 합리적인 대화를 가로막는다.

▷대부분 판사 출신인 헌재 재판관의 구성을 다양화하자는 그의 제안도 비슷한 취지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재판관들이 폭넓게 대화하고 차이를 좁혀야만 판사들만의 집단사고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에선 변호사나 학자, 행정부 공무원, 정치인이 헌재 재판관이 되는 사례가 흔하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헌재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법원이다. 다양한 재판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그들 사이에서도 관용과 절제가 발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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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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