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전공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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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생은 취업 시장에서 찬밥 신세였다. 취업하려면 코딩을 알아야 한다는 조언에 문과생을 위한 코딩 강좌를 듣고, 좀 더 열의 있는 학생들은 사설 학원에서 공대 과목을 들어가며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등장한 이후론 코딩 잘하는 컴공 학생들이 취업난에 시달리고 컴공 학생들이 철학과 강좌를 기웃거린다고 한다. ‘문송’이 아니라 ‘컴송’ 시대다. ▷AI 기술이 인문학도들 몸값을 높이고 있다. 요즘은 일상 언어로 아이디어나 느낌(vibe)을 설명하면 AI가 코드를 짜준다. 바이브 코딩으로 코딩 작성과 설계 기술의 문턱이 낮아지자 질문할 줄 아는 힘, 소통 능력, 윤리적 판단력, 변화를 읽어내는 통찰력이 희소 역량이 된 것이다. 지난해 서울대 철학과 취업률은 77.3%로 컴퓨터공학부의 취업률(72.6%)을 앞질렀다. 잡코리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체 채용공고 가운데 인문계열 우대 공고는 지난해 하반기보다 13% 증가했다. ▷미국도 비슷한 추세다. 지난해 5월 미국 대학 졸업자의 평균 실업률은 4.8%인데 철학과 졸업생 실업률은 3.2%로 더 낮았고, 컴퓨터공학의 경우 7.5%로 평균보다 높았다. 예일대 철학과는 학생들이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 제안을 받고, 철학과 교수들이 실리콘밸리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구글, 메타, 오픈AI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철학 문학 사회학 언어학 전공자들을 채용해 AI 모델의 답변을 정교화하고, 편향성을 감지하며, 윤리적 기준을 세운다. ▷AI 기업들을 보면 철학의 유용함을 실감하게 된다. AI 모델의 할루시네이션(거짓 답변)을 줄이는 데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활용된다. AI의 행동 규범을 담은 헌법을 제정하는데도 철학이 필수적이다. 앤스로픽의 클로드는 칸트의 의무론을 채택해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행위를 금지하기 때문에 가정이나 공공장소 로봇 제작에 유용하다. 구글 제미나이와 오픈AI의 챗GPT는 밀의 공리주의 원칙을 자율주행차 소프트웨어에 적용해 사고가 불가피한 경우 가장 피해가 적은 충돌 방식을 택하도록 설계한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당분간 AI 철학자 일거리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AI에 많은 일을 맡기게 될수록 미묘한 맥락을 읽고 비판적 추론을 해내는 인재가 필요하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기계는 주어진 데이터 범위 안에서만 최적의 경로를 찾지만 인간은 절실함을 동력 삼아 데이터 너머의 무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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