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년전 런던 성직자 살인사건…귀족 여성의 복수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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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작성한 편지.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의 간통을 비난하며, 연인으로 지목된 사제 존 포드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유일한 기록이다. (사진=햄프셔 기록 보관소)

1332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작성한 편지.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의 간통을 비난하며, 연인으로 지목된 사제 존 포드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유일한 기록이다. (사진=햄프셔 기록 보관소)

중세 런던에서 벌어진 성직자 살인 사건의 배후에 권력 다툼과 치욕의 복수가 있었다는 새로운 분석이 나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범죄학과 마누엘 아이스너 교수는 최근 688년 전 발생한 사제 존 포드(John Forde) 피살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단순한 범죄가 아닌 귀족과 성직자 간 권력 투쟁과 복수극이었다고 6일 발표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암살

14세기 런던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케임브리지대 ‘중세 살인 지도’에는 존 포드 피살 사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사건은 귀족 여성의 사주로 벌어진 계획적 암살 사례로 분석됐다. (사진=University of Cambridge)

14세기 런던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케임브리지대 ‘중세 살인 지도’에는 존 포드 피살 사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사건은 귀족 여성의 사주로 벌어진 계획적 암살 사례로 분석됐다. (사진=University of Cambridge)

사건은 1337년 5월 3일 금요일, 런던 웨스트치프 거리에서 벌어졌다.사제 존 포드는 동료 사제와 대화 중이던 중,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의 오빠와 하인 두 명에게 공격당했다.

피습은 성 바울 대성당 인근에서 이루어졌으며, 존 포드는 목과 복부를 찔린 뒤 현장에서 즉사했다. 목격자가 다수 있었지만, 가해자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암살 지시자’는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

1337년 존 포드가 피살된 런던 웨스트치프 거리 일대는 현재 상업 중심지로 변모했지만, 당시에는 중세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살인이 벌어진 ‘범죄 다발 지역’ 중 하나였다. (사진=구글 지도 캡처)

1337년 존 포드가 피살된 런던 웨스트치프 거리 일대는 현재 상업 중심지로 변모했지만, 당시에는 중세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살인이 벌어진 ‘범죄 다발 지역’ 중 하나였다. (사진=구글 지도 캡처)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은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이었다.엘라는 5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기사·성직자·기혼 남성들과 간통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처벌로서 매년 약 1.8kg 무게의 초를 들고 맨발로 솔즈베리 대성당을 7년간 걷는 참회 명령을 받았다.엘라는 이를 공개적인 모욕으로 인식하고 끝내 참회를 거부, 결국 파문되었다. 당시 유일하게 실명이 언급된 연인은 바로 존 포드였다.

아이스너 교수는 “공개적인 모욕은 인간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일으키기 쉽다”며 “엘라는 복수의 기회를 오래도록 기다려왔고, 결국 자신의 오빠와 하인들을 시켜 포드를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포드, 연인이자 밀고자…‘배신의 대가’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엘라와 포드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

1322년, 엘라와 남편 로버트 피츠페인, 그리고 포드는 프랑스계 수도원을 습격해 가축을 훔치고 석재를 파괴하는 등 집단 약탈 행위를 벌인 공범 관계였다.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당시 포드는 피츠페인 가문이 후원하던 교구의 성직자로, 이 가문의 비호를 받고 높은 직위에 올랐던 인물로 추정된다.그러나 수도원 습격 이후, 포드가 엘라의 사생활을 대주교 측에 밀고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아이스너 교수는 “오늘날 정치적 암살과 유사한 이 사건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살인이자 귀족 권력의 과시였으며, 동시에 교회에 대한 경고 메시지였다”고 분석했다.

배심원 33명…그러나 ‘모른다’는 증언만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귀족 여성 엘라 피츠페인은 수도원 습격, 간통, 사제 암살 사주 등으로 중세 사회의 규범을 거세게 위반한 인물로, 교회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건 조사에는 총 33명의 배심원단이 참여했다.

이들은 범행에 가담한 인물들의 이름과 구체적인 경위까지 파악했지만, 가해자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두 “모른다” 고 진술했다.

당시 배심원단은 유죄·무죄를 판단하는 역할이 아니라, 초기 수사에 가까운 조사를 담당했다.

아이스너 교수는 “이는 전형적인 중세의 계급 중심 사법 시스템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포드가 피살된 런던 웨스트치프 거리는 중세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중 하나로, ‘중세 살인 지도’ 프로젝트를 통해 다수의 범죄 사례가 확인됐다. (사진=University of Cambridge)

포드가 피살된 런던 웨스트치프 거리는 중세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중 하나로, ‘중세 살인 지도’ 프로젝트를 통해 다수의 범죄 사례가 확인됐다. (사진=University of Cambridge)

범행 이후 유일하게 기소된 인물은 엘라의 하인이었던 ‘휴 콜른’이었다. 그는 1342년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됐다.

그러나 엘라와 그녀의 가족은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그의 오빠는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몰수 대상에서 제외됐다.

엘라는 남편 로버트 피츠페인이 1354년 사망할 때까지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그가 사망하자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아이스너 교수는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범죄를 주도하며 귀족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중세 여성은 드물다”며 “엘라 피츠페인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최강주 기자 gamja8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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