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광풍, 1990년대 ‘광통신망’의 데자뷔인가?(feat.기술혁명의 패턴)[딥다이브]

2 weeks ago 11
구글이 지난주 공개한 ‘터보퀀트’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흔들고 있죠. 인공지능(AI) 모델의 메모리 사용량을 6분의 1로 확 줄일 수 있는 기술인데요. 한편에선 ‘AI 서비스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줄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날 것’이란 반응이고요. 다른 편에선 ‘비용 효율성이 높아져서 AI 서비스가 대중화할 테니, 반도체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란 논리를 펼칩니다.

뭐가 맞는 얘기일까요? 지금으로선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0년대 후반 시장을 뒤흔들었던 광통신망 구축 붐이 남긴 교훈에 따르면 말이죠. 그리고 이건 기술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명저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에서 설명한 기술혁명의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

AI 기술혁명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있을까. 역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게티이미지

AI 기술혁명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있을까. 역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게티이미지

*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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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섬유가 곳곳에 깔리던 시절

흔히 AI 기술을 둘러싼 거품을 1990년대 ‘닷컴버블’에 비유하곤 하죠. 특히 지금의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닷컴 시절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 시절엔 데이터센터 대신 이게 가장 핫한 첨단 인프라였죠. 광통신망.

굳이 비유하자면 지금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돈을 쏟아붓는 빅테크(아마존·MS·구글·메타 등)는 당시 광통신망을 깔던 통신사(월드컴·글로벌크로싱·퀘스트)와 비슷하고요. GPU를 공급하는 엔비디아는 그 당시의 통신장비업체(시스코·시에나·루슨트),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는 광섬유 케이블을 생산하는 코닝 정도의 위치에 있죠.

1990년대 후반, 인터넷 혁명으로 세상은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이어가는 듯했습니다. 그 시절,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스타트업 사업계획서, 각종 컨퍼런스를 통해 반복되는 주장은 이거였죠. “인터넷 트래픽이 100일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

데이터 사용량이 100일에 2배, 1년이면 1500%씩 폭증할 거란 통계는 업계를 열광케 했고요. 1998년 4월엔 미국 상무부까지 이를 보고서에 인용하면서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유리로 만든 광섬유 케이블은 1990년대 인터넷 혁명을 위한 핵심 인프라였다. 게티이미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유리로 만든 광섬유 케이블은 1990년대 인터넷 혁명을 위한 핵심 인프라였다. 게티이미지

‘앞으로 트래픽이 넘쳐난다. 통신망을 아무리 많이 깔아도 부족하다’고 다들 믿었습니다. 기업들이 앞다퉈 광통신망 구축에 뛰어들었죠. 주요 열차노선과 고속도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옆으로 땅을 파서 유리로 만든 광섬유케이블을 매립하는 경쟁이 시작됩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해저에까지 광케이블이 깔렸죠.

이른바 ‘정보 고속도로’ 구축에 투입된 자금은 엄청났습니다. 1996~2001년 미국 통신회사의 신규 채권 발행 규모가 5000억 달러를 넘었을 정도였는데요. 당시 금융시장이 통신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죠. 일단 통신망을 깔기만 하면 곧 몇 배의 수익으로 돌아올 거라 기대했으니까요. 통신기업의 높은 주가는 부채비율 상승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파티가 갑자기 끝납니다. 미국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돈줄이 막히면서 기업들은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됐고요. 급증하는 것처럼 보였던 매출은 사실 회계 기법으로 부풀려진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사실 인터넷 트래픽은 100일이 아니라 1년에 2배씩만 늘고 있었거든요. ‘100일마다 2배’라는 수치는 월드컴이 퍼뜨린 허구의 수치였던 겁니다.

시장은 빠르게 무너집니다. 2002년 통신업계 거물이었던 글로벌 크로싱과 월드컴이 차례로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당시 세계 최대 광섬유 제조업체 코닝의 주가는 2000년 최고 113달러에서 2002년 약 1달러로 폭락합니다.

다크 파이버와 유튜브의 탄생

사실 당시의 공급 과잉엔 당시 광통신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진화도 한몫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상용화된 고밀도 파장 분할 다중화(DWDM) 기술은 처음엔 광케이블 한 가닥에 8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는데요. 2000년쯤엔 128개 신호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게 됐죠. 갑자기 이미 깔아놓은 광케이블만으로도 공급이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게 된 겁니다.

그럼, 거품이 꺼진 뒤 그 많은 광케이블은 어떻게 됐을까요? 2002년 미국 광섬유 회선의 사용률은 고작 2.7%, 2005년 말까지도 15%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대역폭 비용은 90%나 폭락했죠. 신호(빛)가 흐르지 않아 어둡게 방치된 광섬유를 일컫는 ‘다크 파이버(dark fiber)’라는 말이 생겨났고요. 업계에선 “100년 치 용량이 확보됐다”는 비아냥이 나왔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인터넷은 엔터테인먼트용으로 쓰일 수 없다는 회의론이 많았지만, 과잉 공급된 광통신망 덕분에 2005년 유튜브가 탄생할 수 있었다. AP 뉴시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인터넷은 엔터테인먼트용으로 쓰일 수 없다는 회의론이 많았지만, 과잉 공급된 광통신망 덕분에 2005년 유튜브가 탄생할 수 있었다. AP 뉴시스

여기까진 참담한 실패 스토리인데요. 이제부터 반전이 있습니다. 광통신망이 흔하디흔해지면서 드디어 인터넷 혁명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유튜브(2005년)와 넷플릭스(2007년)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용 때문에 동영상 서비스는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젠 가능해진 거죠.

또 2006년 아마존의 AWS(아마존 웹 서비스) 출범과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등장의 배경에도 다크 파이버가 있습니다. 이미 저렴한 광통신망이 전국적으로 깔려 있었기에, 큰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먼 곳의 데이터센터와 기업을 연결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2004년 탄생한 페이스북이 전 세계 수십억 명을 연결하는 소셜미디어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륙을 연결하는 광통신망 고속도로가 이미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의 엄청난 과잉 개발은 현대 디지털 경제의 발판이 됐습니다. 다크 파이버는 100년은커녕, 약 15년 만에 소진됐어요. 이후 빅테크들은 직접 나서서 해저케이블을 추가로 깔고 있죠.

기업의 데이터를 멀리 떨어져 있는 데이터센터에 보관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는 미국 전역에 묻혀있던 다크 파이버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게티이미지

기업의 데이터를 멀리 떨어져 있는 데이터센터에 보관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는 미국 전역에 묻혀있던 다크 파이버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게티이미지

결국 인터넷은 세상을 바꿀 혁명이었고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대륙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통신망 인프라가 촘촘하게 깔려야만 하는 것도 맞았습니다. 1990년대 투자자들이 내놨던 전망 중 상당 부분은 사실이었던 거죠. 다만 당시의 기대와 달리 기술혁명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고요. 과잉 투자와 수요 폭발 사이엔 시차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중간엔 닷컴버블 붕괴라는 큰 전환점을 겪어야 했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1700년대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난 약 250년 동안의 모든 기술혁명이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걸요. 기술혁명과 버블을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책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카를로타 페레스, 2002년 작)을 통해 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AI 혁명, 전환점 다가오는 이유

18세기 후반 영국 산업혁명 이래로 경제와 사회를 재편한 기술혁명은 5차례 있었습니다. 40~60년에 한 번꼴로 기술혁명이 찾아온 거죠. 그리고 그 기술혁명의 전반기엔 특히 새로운 인프라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가 일어났죠. 그리고 이는 거품 붕괴 또는 공황으로 이어지는 게 공식이죠.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산업혁명(핵심국가: 영국)
-시작: 1771년 영국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 공장 가동
-주요 인프라는 운하. 1790년대 초 운하 주식에 대한 광적인 투자 발생
-1793년부터 운하 프로젝트의 거품 붕괴하며 은행 파산. 1797년 금융 공황

증기와 철도의 시대(영국)
-시작: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용 ‘로켓’ 증기기관차 시험 주행 성공
-주요 인프라는 철도. 1840년대 중반, 철도 건설 붐이 일면서 주식 투기 극에 달해
-1845년 철도 주식 거품 붕괴. 1847년 철도 공황

강철과 전기의 시대(미국)
-시작: 1875년 미국 피츠버그에 카네기 베세머 강철공장이 설립
-주요 인프라는 강철레일. 과도한 철도 건설로 버블 발생
-1893년 주가 급락과 은행 뱅크런을 시작으로 수백개 은행과 기업 파산

1908년 미국 포드가 출시한 모델T. 포드 제공

1908년 미국 포드가 출시한 모델T. 포드 제공

석유와 자동차, 대량생산의 시대(미국)
-시작: 1908년 미국 포드의 모델T 출시
-주요 인프라는 자동차와 도로. 1920년대 내내 극단적인 주식 열풍이 일어남
-1929년 대공황

인터넷 혁명(미국)
-시작: 1971년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발표
-주요 인프라는 디지털 통신. 1990년대 닷컴 버블
-2000년 3월 나스닥 거품 붕괴

그런데 저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진짜 말하려는 기술혁명의 공통점은 따로 있습니다. 광란의 투기가 거품 붕괴와 경기침체라는 대폭락을 불러오지만, 그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본격적인 호황기가 찾아오더라는 게 핵심이죠. 그리고 이때 기술혁명은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2002년은 아직 닷컴버블 붕괴의 한복판이었던 시기인데요. 이미 그는 이후에 인터넷 기술혁명의 정점이 찾아올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기술혁명에 대한 금융자본의 투기가 만들어낸 버블은 언젠가는 결국 터진다. 게티이미지

기술혁명에 대한 금융자본의 투기가 만들어낸 버블은 언젠가는 결국 터진다. 게티이미지

그럼, 왜 이렇게 역사가 반복될까요.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있어 금융자본과 생산자본의 속도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은 움직임이 매우 기민하죠. 높은 이익을 좇아서 빠르게 새로운 기술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신기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며 인프라 투자 붐을 일으켜서 막대한 이익을 거둡니다.

이와 달리 생산자본(산업계)은 느리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미 구체제에서 갖춰진 기술과 설비가 있는데, 단번에 이걸 버리고 옮겨갈 순 없으니까요.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회적 상식 수준으로 자리 잡으면 그제야 움직이게 됩니다. 이때부터가 기술혁명에 있어선 진짜 ‘황금기’라 할 수 있죠.

바로 이런 속도 차이로 인해 기술혁명은 크게 두단계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1단계 구축기는 금융자본이, 2단계 배치기는 생산자본이 주도하죠. 그리고 1단계의 막바지, 즉 금융자본의 기술혁명에 대한 투기가 극에 달한 직후엔 시장이 붕괴하는 ‘전환점’이 찾아오고요. 이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아요.

구글 나노바나나를 이용해 만든 그래픽.

구글 나노바나나를 이용해 만든 그래픽.

아니, 그럼 고통스러운 버블 붕괴가 없게 좀 천천히 신중하게 금융자본의 투자가 진행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저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렇게 기술혁명 초반에 금융자본이 집중되는 게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효과적 방법”이라고 평가하죠. 투자자들을 열광케 하는 금융시장의 거품이 있었기에 기술혁명을 위한 기반 인프라가 마련될 수 있었단 겁니다. 금융은 그저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죠.

그럼 2026년 현재 진행 중인 AI 기술혁명은 어디쯤 와있을까요. 주식시장의 분위기나 데이터센터에 대한 엄청난 투자 열풍을 감안하면 1단계의 후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광란’의 시기라고 부르는 기간이죠. 카를로타 페레스의 논리대로라면 언젠간 한번 큰 전환점이 찾아올 거란 뜻입니다. 페레스는 이 광란의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란은 모든 면에서 극도로 불균형한 번영과 양극화가 심화하는 시기이다. 번영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성장이 도래했다고 ‘뉴 이코노미’를 찬양한다. 반면, 현대화의 길을 걷지 않았거나 걸을 수 없는 산업, 국가, 지역, 기업들은 명백히 쇠퇴하고 저성장과 자금 부족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그들에게 지금은 끔찍한 시기다. 따라서 ‘광란의 시기’란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시기이다. 금융자본은 이러한 양극화된 단계의 원심력을 가속하는 역할을 한다. 돈에 대한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한다. 개인적 이익은 찬양받고, 사회적 이익은 경멸받는다. 부자라는 것은 ‘선한’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실패다.“

어떤가요. 현실과 비교했을 때 설명이 들어맞나요? 만약 지금 시기가 끔찍하다고 여긴다면,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영원하진 않고 끝이 있다는 점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쪽이라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언제 어떻게 낭떠러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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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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