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개발자는 면사무소가 아니라 목욕탕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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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에서 건축가 정기용은 면사무소를 설계하기 전 주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주민들은 새 면사무소를 짓지 말라고 답하다가, 꼭 짓겠다면 목욕탕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집에서는 물이 졸졸 나와 제대로 씻기 어렵고, 목욕을 하려면 1년에 몇 번 봉고차를 빌려 대전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서 ‘면사무소’는 공급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럴듯한 해결책을, ‘목욕탕’은 사용자의 삶을 직접 들여다봐야 발견할 수 있는 실제 문제를 상징한다. 건축가가 건물보다 그곳을 사용할 사람의 삶을 먼저 봐야 하듯, 개발자 역시 코드보다 제품을 사용할 사람의 삶을 먼저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좋은 의도로 만든 결정도 사용자의 구체적인 하루를 보지 못하면 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글에서는 야간자율학습 폐지를 사례로 든다. 학생에게 방과 후 시간을 돌려주려는 정책이었지만, 사교육을 받기 어려운 학생에게는 저렴한 저녁 식사와 안전한 공부 공간, 교사에게 질문할 기회까지 함께 사라지는 일이었다. 개발자도 같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좋은 아키텍처와 아름다운 코드를 만드는 일 자체에서 효용을 느끼다 보면, 개발은 사용자의 삶에 필요한 변화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이 뒤로 밀린다. 그렇다고 코드 품질이 덜 중요해졌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높은 코드 품질은 제품을 고민하기 위한 기본 조건에 가깝다. 에이전트가 작성한 코드를 검증하지 못하거나 작은 변경의 영향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빨라진 개발 속도만큼 잘못된 제품도 더 빠르게 만들게 된다. AI 시대의 변화는 개발 역량의 축소가 아니라 개발자 역할의 확장이다. 코드를 잘 만드는 능력을 바닥에 두고, 그 위에서 사용자의 문제와 제품의 방향까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사용자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창한 리서치 체계나 데이터 분석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객 문의 한 건을 직접 읽거나 사용자가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자동화가 상담원과 이야기할 마지막 통로를 없애지는 않았는지, 편의를 위해 제거한 입력 단계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확인 과정이 숨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AI 에이전트가 벌어준 시간은 자동으로 가치가 되지 않는다. 그 시간으로 기능을 더 많이 만들 수도 있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용자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다. 앞으로 개발자에게 필요한 역량은 또 다른 기술뿐 아니라 철학·인문학·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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