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기업 경영권 분쟁에서 '성년후견제도'가 새로운 법적 쟁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상속 다툼이나 지분 경쟁을 넘어서, 그룹 총수의 정신적 판단 능력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기업의 지배구조를 뒤흔드는 결정적 변수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는 피성년후견인을 보호한다는 제도 본연의 취지를 넘어서, 경영권 다툼의 핵심적인 '법적 카드'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년후견제도의 기본 구조와 작동 원리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 처리 능력이 부족한 성인을 위해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여 재산 관리와 신상 보호를 지원하는 법적 장치입니다.
법원은 개인의 정신 능력 상태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후견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사무 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경우에는 '성년후견', 사무 처리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는 '한정후견', 일시적이거나 특정 사무에 대해서만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특정후견'으로 분류됩니다. 선임된 후견인은 법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범위 내에서 피후견인의 신상 결정, 재산 관리, 법률 행위의 대리 및 동의 등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한국앤컴퍼니그룹 '형제의 난' 대표적 사례
성년후견제도가 경영권 분쟁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대표적 사례는 한국앤컴퍼니그룹(구 한국타이어그룹)의 '형제의 난'입니다. 이 분쟁은 2020년 조양래 명예회장이 자신의 전체 지분을 차남인 조현범 회장에게 블록딜 방식으로 양도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장녀인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의 결정이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자발적 의사로 이뤄진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서울가정법원에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지분 증여 행위의 법적 효력을 근본적으로 다투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법원이 조 명예회장에 대한 성년후견 개시를 결정했다면, 선임된 후견인이 해당 주식 매각 행위의 적법성을 재검토할 수 있었고, 이는 경영권의 향방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1심 법원이 조 이사장의 청구를 기각했지만, 이 사례는 성년후견제도가 총수 일가의 단순한 재산 분쟁을 넘어서 기업의 지배구조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법적 무기임을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롯데그룹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 바 있습니다. 과거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씨가 법원에 성년후견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은 신 명예회장이 중증 치매 등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정후견인을 지정한 사례가 있습니다.
경영권 분쟁에서 다면적 활용
창업주나 최대주주가 고령이거나 건강상의 문제를 안고 있을 경우, 그의 의사결정 능력은 기업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거액의 주식 증여, 상속, 주요 계약 체결 등의 중요한 경영 결정은 모두 명확한 의사 능력에 기반해야만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속이나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이 발생하면, 특정 자녀나 주주가 총수의 판단 능력을 문제 삼아 성년후견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성년후견제도는 경영권 분쟁에서 여러 가지 전략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식 증여 및 상속의 무력화입니다. 총수가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행한 재산 처분 행위의 효력을 법적으로 다툴 수 있습니다. 둘째, 경영권 승계 구도의 재편입니다. 후견인이 선임되면 총수의 의결권 행사를 비롯한 경영상 중요 결정에 후견인이 개입하게 되어 기존의 승계 구도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습니다.
셋째, 재산의 보전 효과입니다. 후견인이 선임되면 법원의 통제 하에서 피성년후견인의 재산이 관리되므로, 피성년후견인의 재산이 무분별하게 낭비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이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넷째, 상대방에 대한 도덕적·법적 압박 효과입니다. 경영권 분쟁 상대방이 총수의 판단력 저하를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여론을 형성하고 그들의 법적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리스크 관리
한국 사회가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업 창업주들의 연령 또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성년후견제도가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법적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전 예방 조치가 필요합니다. 명확한 유언 및 상속이나 승계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정기적인 건강 검진과 의사결정 능력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확보해야 합니다. 또한 투명하고 합리적인 지배구조를 확립하고, 미리 신탁이나 임의후견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등 분쟁의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체계적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년후견제도는 본래 정신적 제약이 있는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그 경영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법적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현실을 기업들은 냉정히 인식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