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 힘든 곳 떠올리며… 여행 넘어 향수를 읊다

5 days ago 13

[한시를 영화로 읊다] 〈136〉 지명의 수사학

영화 ‘인 디 에어’에선 주인공 빙엄이 장거리 출장으로 거쳐 가는 도시명들이 나열된다. CJ ENM 제공

영화 ‘인 디 에어’에선 주인공 빙엄이 장거리 출장으로 거쳐 가는 도시명들이 나열된다. CJ ENM 제공
한시에는 구절마다 지명을 넣어 읊는 독특한 시 쓰기 방식이 있다. 남조(南朝) 송나라 사장(謝莊)의 작품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는데(‘自潯陽至都集道里名爲詩’), 우리 한시 중엔 고려 말 권근(權近·1352∼1409)의 다음 시가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인 듯하다.

시인이 1389년 왕명으로 당시 명나라의 서울이었던 금릉(金陵)을 다녀오며 남긴 연작시 중 한 수다. “머물러 있는 동안 지나온 곳들을 헤아린다(淹滯之中, 數其經歷也)”라는 부제처럼, 시인은 육로와 해로를 경유한 이역만리의 체험을 읊었다. 다만 실제 이동 경로를 순서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현실의 지명과 상상 속 공간을 교묘하게 엇섞으며 사행 경험과 감회를 담아냈다. 실제 지명인 사문도(沙門島), 갈석산(碣石山), 연(燕), 요(遼)와 전설 속 신선의 공간인 봉래(蓬萊)와 영주(瀛洲)가 나열된 뒤 부소산(扶蘇山)과 자하동(紫霞洞)이란 우리 지명을 제시하여 자신의 향수를 드러냈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인 디 에어(Up In The Air·2009년)’에서도 미국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라스베이거스, 마이애미, 디트로이트 등 주인공 라이언 빙엄이 거쳐간 수많은 도시명이 나열된다. 인간관계를 불필요한 배낭 속 짐이라고 생각하는 해고 전문가 빙엄은 1년에 322일을 비행기로 이동하며 1000만 마일리지 도달을 목표로 삼을 뿐이다. 1000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비행기 안에서 기장은 축하하며 집이 어디냐고 묻지만 빙엄은 여기라고 답한다.

시와 영화 모두 낭만적인 여로를 다룬 건 아니다. 국제 정세의 변동 속 외교적 난제나 경제 위기로 인한 기업 구조조정이란 엄혹한 현실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시인이 활용한 지명의 수사학은 단순히 미지의 광대한 외부 세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진정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다룬 영화와 달리, 한시는 가기 어려운 먼 곳의 지명들을 호명하면서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움베르토 에코는 서구 문학작품에서 공간의 광활함과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지명을 끝없이 나열하는 방식을 실용적 목록과 시적 목록으로 나눠 구분한 바 있다(‘궁극의 리스트’). 이동 장소의 실용적 목록인 영화와 달리, 시의 지명들은 호명돼 공간의 파노라마를 이루는 순간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시적 목록’으로 확장된다. 낯설고 먼 것들이 가깝고 익숙한 것들을 소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한시의 지명들은 여행 기록을 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수사학이 된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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