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서 육군 250주년 열병식
트럼프 79세 생일 축하쇼 방불
LA·뉴욕 등서 '노 킹스' 집회
"대통령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
집권 2기 최대 反트럼프 시위
"오늘 아침 미네소타주에서 민주당 의원 두 사람이 살해됐다. 미국은 더 이상 내가 생각하던 나라가 아니다."
1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원에서 만난 캐럴 톰슨(63)과 레너드 톰슨 부부는 이렇게 말했다. 레너드 톰슨 씨는 "트럼프를 대통령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며 "그의 행동은 권위주의 국가의 독재자와 같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민중들이 투쟁하는 내용의 가사 일부를 가져와 왕관을 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림에 적었다.
이날 이 공원에는 톰슨 부부와 같이 트럼프에 반대하는 '노 킹스(No Kings)' 시위자들이 몰려들었다. 시청 앞 광장까지 행진하는 무리에는 1만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언론은 추산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온두라스 이민자는 "나는 합법적으로 왔지만 부모와 가족이 불법체류 신분"이라면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밝혔다.
지난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에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하면서 이번 시위가 더 부각됐지만 참석자들은 이민문제를 떠나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관세는 미국인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라는 팻말을 든 리사 벨른 씨(62)는 "트럼프가 우리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내가 아는 일본인 친구는 입국을 거부당할까봐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건 트럼프 때문이지 우리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고 토로했다.
시위 참여자는 백인과 히스패닉이 주를 이뤘지만 아시아계와 흑인도 일부 눈에 띄었다. 필리핀계 아시안인 알린 와타나베 씨(50)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보가 아시아계에도 불안감을 주고 있다"면서 "나는 부모님이 필리핀에서 건너온 이민 2세대인데, 트럼프로 인해 내 아이들에게 미국은 '우리나라'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운동이 '노 킹스' 시위로 불리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국가 대통령이 아니라 권위주의 국가 독재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이날 미 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해 열병식이 수도인 워싱턴DC에서 개최된 것 역시 논란거리가 됐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과 같은 날이어서 독재자의 생일에 대규모 군사열병식을 여는 권위주의 국가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진보성향이 강한 미 동부 뉴욕시에는 더 큰 규모의 인파가 몰렸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맨해튼 중심 브라이언파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운집해 연신 '반(反)트럼프' 구호를 외쳤다.
뉴욕경찰(NYPD)이 추정한 시위 참가자들은 5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브라이언파크를 출발해 5번가 남쪽으로 행진을 벌였다. 뉴저지주에서 온 케빈 파월 씨(37)는 "ICE가 정당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이민자들을 무자비하게 단속하는 행태에 분노해 단결된 목소리를 내려고 나왔다"면서 "과거 나치 독일의 독재정권과 다름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는 "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법원도 속도를 내지 못해 결국 미국 시민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7세 아이와 함께 나온 브루클린 출신 에마 스미스 씨(32)는 "아이에게 불의에 침묵해서는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다"면서 "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고 말했다.
LA에서 뉴욕까지 날아온 팻 램버트 씨(30)는 "미국은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다. 이민자들의 고통에 침묵할 때 사회는 후퇴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했다.
지난주 대규모 폭력시위가 있었던 LA에서는 주최 측 추산 20만명이 몰려 행진에 참여했다. 하지만 행진이 끝난 후 일부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면서 경찰이 고무탄을 쏘며 진압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뉴욕·LA·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도시에서 열린 '노 킹스' 시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최대 규모 반대 집회다.
열병식을 이유로 주요 도시 중 유일하게 '노 킹스' 시위가 벌어지지 않은 워싱턴DC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열병식을 참관했다. 첫 번째 임기 때 추진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개최하지 못한 것을 두 번째 임기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열병식은 오후 6시께 워싱턴DC의 상징인 링컨기념관에서 워싱턴모뉴먼트까지 진행됐다. 육군에 따르면 이날 열병식에는 군인 약 6700명, 차량 150대, 항공기 50대, 말 34마리 등이 참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백악관 인근에 설치된 대형 무대에서 장병들의 퍼레이드를 내려다봤으며 종종 일어서서 군인들의 경례에 거수경례로 답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 정도 규모 열병식이 열린 건 1991년 이라크를 상대로 한 걸프전쟁 승전 퍼레이드 이후 34년 만에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열병식이 자신의 생일과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생일에 군을 부적절하게 이용한 모양새가 됐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무대에 오르자 일부 관객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고 CNN은 보도했다. J D 밴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 앞서 발언하면서 이날이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혼기념일이라고 말했다. 가수 리 그린우드도 행사에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 노래로 유명한 '갓 블레스 더 유에스에이'를 부르고 생일을 축하했다.
[뉴욕 윤원섭 특파원 / 샌프란시스코 이덕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