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고, 상상하고, 행동하라… 세계여행 같았던 ‘식물원 교육 올림픽’[김선미의 시크릿가든]

4 days ago 5

서울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13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특별 음악회. 국립수목원 제공


12일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폐회식에서 선보인 단어 구름. 총회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키워드는 생물다양성, 글로벌 네트워크, 시민과학 등이었다. 국립수목원 제공

12일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폐회식에서 선보인 단어 구름. 총회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키워드는 생물다양성, 글로벌 네트워크, 시민과학 등이었다. 국립수목원 제공

폴 스미스 국제식물원보존연맹(BGCI·Botanic Gardens Conservation International) 사무총장이 무대에 올라 말했다. “팬데믹은 전 세계 식물원에 도전이자 기회였습니다. 거의 유일한 피난처가 식물원이었으니까요. 생물다양성 위기를 겪는 지금, 나무가 문화에 깊이 스며든 한국에서 총회를 열게 돼 기쁩니다.”

9~13일 국립수목원과 BGCI 주최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등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를 참관했다. 이번 총회 주제는 ‘변화를 위한 교육’. 51개국에서 1600여 명이 참가한 ‘식물원 교육 올림픽’은 동아시아 최초 개최라는 상징성만큼이나 교육적 실험과 상상으로 가득했다.

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폴 스미스 BGCI 사무총장이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제공

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폴 스미스 BGCI 사무총장이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제공

●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

총회는 140건의 발표와 45건의 워크숍이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흥미로워 보이는 프로그램이 많아 몸이 하나인 게 야속할 정도였다. 첫날 눈길을 끈 ‘참여형 예술: 식물에 대한 시각적 대화’라는 워크숍에 참여했다. 아이슬란드 예술교육자 아스틸더 박사는 파스텔과 검은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우리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둘씩 짝지어 앉아 눈을 감고 각자 가장 좋아하는 식물을 떠올려 보세요. 상대에게 그 식물을 말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식물을 정확히 그릴 게 아니라 추상적으로 표현할 거예요. 자, 이젠 색을 골라 정원의 길을 그려 보세요. 그 길을 따라가며 식물을 만날 거에요. 근사하죠?”

 식물에 대한 시각적 대화’ 워크숍. 한 참여자가 자신이 상상한 식물을 설명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9일 열린 ‘참여형 예술: 식물에 대한 시각적 대화’ 워크숍. 한 참여자가 자신이 상상한 식물을 설명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다음은 자신이 생각한 식물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각 대륙에서 모인 참가자들은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식물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진행됐던 ‘음성 이미지 미술관 여행’이 떠올랐다. 비장애인이 시각장애인에게 작품을 설명하자 은유가 풍성해져 감상이 깊어지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다.

총회장에도 ‘시크릿가든’이 있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우리 자생식물들로만 조성한 실내 정원이었다. 맞은편 벽면에는 ‘러쉬 아트페어’에 참여한 발달장애 예술가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기후 위기로 위태로운 자생식물들을 관찰해 섬세하게 표현한 이 전시는 총회 세부 주제 중 하나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의 일환이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우리 자생식물 50여 종으로 조성한 총회 행사장의 실내 정원. 정원 뒤로 발달장애 예술가의 작품이 보인다. ICEBG는 세계식물원총회의 약자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우리 자생식물 50여 종으로 조성한 총회 행사장의 실내 정원. 정원 뒤로 발달장애 예술가의 작품이 보인다. ICEBG는 세계식물원총회의 약자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미래를 향한 식물원

강연장을 옮겨 다니며 각국 식물원 관계자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세계여행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어린이와 청소년, 그들이 만들어 나갈 미래를 향해 있었다. 식물원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교육과 치유의 핵심 플랫폼이었다.‘예술과 과학의 융합: 교육 혁신의 창조와 발전’ 세션에서는 식물원 교육이 다양성을 품기 위해 예술과 과학의 접점이 강조됐다. “예술은 데이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예술은 감정과 연결되는 통로를 제공한다”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호주에서 온 참가자는 아이들이 과학자와 시간을 보낸 후 예술가와 함께 꽃잎과 돌로 작업하게 하는 ‘어린 식물학자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미국 마이애미 페어차일드 열대식물원의 애미 패돌프가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접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제공

미국 마이애미 페어차일드 열대식물원의 애미 패돌프가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접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제공

‘식물원 교육을 위한 융복합 접근’ 세션에서는 미국 마이애미 페어차일드 열대식물원 관계자가 말했다. “어떻게 미래 세대를 과학의 동반자로 참여시킬 수 있을까요. 체험을 통해 마음을 움직여야 능동적인 환경 지킴이를 길러낼 수 있습니다.” 이 식물원은 청소년의 녹색 비전을 정책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마이애미 거버먼트센터 구역은 도시의 생물다양성을 기록해 온 학생들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도 협력해 우주 과학자의 꿈을 키우도록 돕는다.

미국 마이애미 거버먼트센터 구역 재개발에 영감을 준 지역 학생의 그림. 페어차일드 열대식물원 제공

미국 마이애미 거버먼트센터 구역 재개발에 영감을 준 지역 학생의 그림. 페어차일드 열대식물원 제공

지역 난민들을 가드닝에 참여시키는 영국 왕립원예협회(RHS) 브릿지워터 정원, 12ha나 되는 쓰레기 산을 유럽 최대 야자수 식물원으로 탈바꿈시킨 스페인 팔메텀 사례 발표도 인상적이었다.

● 국경을 넘어 국격을 높이다

코엑스 맞은편 봉은사에서 열린 야외 워크숍은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특히 인기였다. ‘나무 에너지를 느끼는 감각을 깨워 보세요’ 워크숍에 참가하니 프랑스 명상 교육자가 말했다. “나무가 된 것처럼 땅에 뿌리내리는 상상을 해보세요.” 감정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지금 여기’에 정박시키는 연습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 참가자는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국립세종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뱅크를 견학하기도했다. 총회 마지막 행사로 13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열린 평화음악회는 깊은 울림의 하이라이트였다.

11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열린 ‘나무 에너지를 느끼는 감각을 깨워 보세요’ 워크숍 참가자들이 프랑스에서 온 명상 교육자의 안내에 따라 체험을 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11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열린 ‘나무 에너지를 느끼는 감각을 깨워 보세요’ 워크숍 참가자들이 프랑스에서 온 명상 교육자의 안내에 따라 체험을 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13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특별음악회. 바이올린, 장구, 피아노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국립수목원 제공

13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특별음악회. 바이올린, 장구, 피아노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국립수목원 제공

총회 기간 한국과 세계의 식물원이 더 깊이 연결되는 실질적 협력이 이어졌다. 국립수목원은 미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과 식물 유전 자원의 중복 보전과 공동 연구를 협력하기로 했다. 유네스코와 지속가능발전교육, 중앙아시아 4개국과는 생물다양성 공동 연구를 해 나가기로 했다. 매년 6월 12일을 세계 식물원 교육의 날로 지정하는 데에도 합의했다.

1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만찬 공연. 국립수목원 제공

1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 만찬 공연. 국립수목원 제공

무엇보다 국내 식물원들의 자긍심이 커진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노력의 씨앗들이 잎을 돋워 국격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은 “다학제 융복합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 요소를 총회에 균형 있게 담아내려 했다”며 “한국의 수목원과 식물원도 당당히 ‘K-컬처’의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폐막식이 끝나고 총회 참가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국립수목원 제공

폐막식이 끝나고 총회 참가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국립수목원 제공

“120년 전 미국에 왔던 한국 식물들, 이제 고향 갑니다”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국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 인터뷰

총회에서 만난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은 “한국의 함박꽃나무와 노각나무를 좋아한다”며 웃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총회에서 만난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은 “한국의 함박꽃나무와 노각나무를 좋아한다”며 웃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제11차 세계식물원교육총회에서 만난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국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은 수목원을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지구적 협력의 무대’라고 표현했다. 9일 국립수목원과 식물유전자원 중복 보전 협력 의향서에 서명한 그는 120년 전 한국에서 수집된 식물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1872년 설립된 아놀드수목원은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수목원이다. 이 수목원이 보유한 식물 2100여 종(種) 가운데 200여 종(600여 개체)이 한국 자생식물이다. 프리드먼 원장은 “1905~1919년 한국에서 수집한 식물을 보존하고 있는 아놀드수목원에 최근 한국 국립수목원이 유전자 자원을 요청해 기꺼이 보내기로 했다”며 “식물 유전자를 갖고 있다가 필요할 때 다시 되돌려줄 수 있는 중복 보전이야말로 전 세계 식물원이 함께해야 할 핵심 역할”이라고 말했다.

“만약 어떤 종이 한국에서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가진 유전자 자원을 기반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국 내 위기종이 사라질 경우, 한국에서 되살려줄 수도 있겠죠. 이건 일종의 지구적 보험입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온 식물들 자손이 지금은 보스턴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유전자를 한국에 보내는 건 단순한 과학적 행위가 아니라 책임입니다.”

9일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왼쪽)과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이 식물자원 공동연구와 산림문화 자료 공유를 위한 협력의향서(LOI)를 교환했다. 임 원장이 들고 있는 사진은 아놀드수목원이 갖고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의 나무 사진을 프리드먼 원장이 선물로 준 것이다. 두 기관은 올해 광복절에 맞춰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 국립수목원 제공

9일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왼쪽)과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미 하버드대 아놀드수목원장이 식물자원 공동연구와 산림문화 자료 공유를 위한 협력의향서(LOI)를 교환했다. 임 원장이 들고 있는 사진은 아놀드수목원이 갖고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의 나무 사진을 프리드먼 원장이 선물로 준 것이다. 두 기관은 올해 광복절에 맞춰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 국립수목원 제공

이번 총회를 계기로 국립수목원과 아놀드수목원은 유전자 자원의 공동 보존 및 교환, 공동 연구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프리드먼 원장은 “각 식물은 고유한 이야기와 역사를 품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의 뿌리를 통해 과거를 배우고 미래를 위한 책임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아놀드수목원에 있던 한국 식물이 돌아오면 국립수목원은 온실 재배를 거쳐 올해 대한민국 광복 80주년 기념 행사 때 전시식물로 활용한 뒤 증식시킨다는 계획이다.

프리드먼 원장은 이번 방한 기간 창덕궁 비원과 리움을 방문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찍은 비원의 백송 사진을 보여줬다. “나무의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았어요.” 리움의 청자와 기와에 새겨진 식물 문양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작품 출처를 표기하듯, 수목원에서는 각 식물을 언제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수집했는지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수목원은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박물관입니다.”

그는 “한국 수목원 관계자들과 교류하며 친구가 됐다”며 “식물 외교는 결국 사람 외교”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후 위기 시대에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한 그루 나무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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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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