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서 피어난 춤…행복이란 관계 맺음으로 이어지다

익숙함은 거대한 벽이다. 낯선 것보다 무겁고 딱딱하다. 적어도 무언가를 창작해서 내놔야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그렇다.

여기 수많은 사람이 오래 듣고 말 그대로 익숙해진 음악이 있다. 그만큼 단단하던 그 음악들이 말랑한 질감을 거치고 춤의 언어를 통해 다른 음악이 됐다. 서울시발레단과 안무가 요한 잉거가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린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음악과 춤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보여준다.

오는 1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무대는 잉거의 대표 안무작 두 편으로 구성됐다. 첫 무대를 장식한 ‘워킹 매드’는 소리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하다시피 한 음악에 안무가가 어떻게 춤을 관통시키며 해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워킹 매드’를 이끈 주요 음악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다. 볼레로는 두 개의 주제 멜로디를 중심으로 악기들의 소리가 하나씩 더해지고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워킹 매드’의 움직임은 그 소리가 명령하는 구도에 따라가지 않고 완전히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를 입혀 단순한 리듬 사이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촘촘하게 끼워 넣은 것이다.

‘워킹 매드’에서 벽은 단순히 서 있기만 한 사물이 아니다. 이동하고 접히고 바닥에 놓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대를 구획 짓고 동시에 무대를 확장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다양한 인간사와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문을 오가고, 벽을 넘고, 벽을 쓰러트려 그 위를 밟고, 벽에 기대며 농밀한 감정의 표현에 방점을 찍으면서 벽을 통해 익숙함이란 벽을 넘는다.

‘블리스’ 역시 음악에 대한 해석이 빛난 작품이다. ‘블리스’는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를 통해 재즈 음악의 즉흥성을 춤이라는 이미지로 전사(轉寫)한 작품이다.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광기 그리고 관계 맺음이다. 잉거는 반복적인 ‘볼레로’의 리듬에서 일종의 광기를 읽어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무대는 광기가 어떻게 신의 선물이 됐는지 보여줬다. ‘워킹 매드’에서는 광기가 삶에 깊이 개입했다면 ‘블리스’에서는 그 광기로 화사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전설로 기억될 정도로 빛을 보여준 한 연주가 안무가에게 환한 광기를 전염시켰다.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관계 맺음이라는 선 안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음악은 안무가를 관통하며 관계를 맺고 영감을 건드려 음악과 춤의 관계를 짓고 그것이 무용수와 춤의 관계, 무용수와 관객의 관계, 관객과 춤의 관계라는 무수한 ‘맺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춤과 나의 관계로 수렴된다. ‘워킹 매드’와 ‘블리스’의 제목 그대로, 이 무대를 통해 우리는 미쳐서 걷다가 더없는 행복을 만난다.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