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을 문제 삼았던 윤석열 정부 역시 국가채무 증가 속도를 크게 늦추진 못했다. 윤 정부에서 국가채무는 205조 원 늘었다. 문 정부를 거치면서 늘어났던 국가채무보다는 적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보단 더 많다. 심지어 윤 정부의 3년 치 국가채무 증가액은 이들 정부의 5년 치, 4년 치보다도 많다. 2022년 한 해 동안 증가한 국가채무는 그해 예산을 짠 문 정부 탓도 일부 있지만 5월부터 나라 살림을 책임졌던 건 윤 정부다.
윤 정부는 줄기차게 재정 건전성을 외쳤지만 결국 말뿐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재정준칙’이다. 재정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묶는 것이 핵심인 재정준칙은 윤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 윤 전 대통령은 “방만한 지출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라며 국회에 재정준칙 법제화 법안 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 정부 출범 후 재정준칙이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랏빚 관리를 위해 정부 씀씀이를 줄이는 건 올해도 쉽지 않다. 어려운 내수를 살리려면 정부의 12조 원 필수 추가경정예산이 꼭 필요하다. 또 예정에 없던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도 나랏돈이 더 들어간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공약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는 인공지능(AI) 학습과 연산에 필수적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최소 5만 개 이상 확보하겠다고 했다. 최신형 GPU 5만 개를 사고 운영하는 데는 3조5000억 원 넘게 들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의힘은 2월부터 소상공인에 대한 현금성 지원 정책을 잇달아 내놓은 바 있다.필요한 곳에 나랏돈을 쓰는 걸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 없이 일단 쓰고 보자는 행태가 반복되는 건 문제다. 3년 전 대선 때 정치권에선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졌다. 그중 여야 모두가 약속했던 ‘병사 월급 200만 원’은 예산에 그대로 반영됐다. 청년들에겐 기쁜 일이었지만 초급 군 간부 처우 개선, 첨단 무기 도입 등에 쓸 돈이 줄어 재원 배분을 왜곡한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앞으로 40일 넘게 이어질 대선 레이스에선 수많은 공약들이 발표될 것이다. 표심을 잡기 위한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이 지난 대선 때와 똑같이 흘러가선 안 된다. 무엇보다 나라 살림은 전보다 더 나빠졌다. ‘총알’인 세수마저 2년 연속 펑크가 났고 올해도 빠듯하다. 후보들은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비전과 실행 계획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나랏빚의 절대 규모를 당장 줄이진 못해도 증가 속도만큼은 더 늦춰야 한다. 나랏빚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정치에는 미래가 없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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