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새겨진 존재의 기억…소리로 말하는 영화들

3 days ago 5

# 1

이미 목소리가 많이 상했고 무대에 서 본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간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브루나는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들의 대화를 묵묵하게 곁에서 듣던 페루치오는 브루나가 괜한 칭찬을 한다고 슬쩍 타박을 주지만 그의 마음 또한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고 있다.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IMDb

아마도 그녀의 곁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페루치오와 브루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며 그녀의 재능과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그녀의 상황이 어떻든 든든한 울타리와 같은 마음으로 그녀 곁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칼라스. 오페라의 주역을 맡으며 다른 프리마돈나들과는 다른 엄청난 힘과 강렬함을 쏟아내던 그이다. 그녀의 무대는 남다른 힘이 넘쳤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에너지가 있었다. 혹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마리아 칼라스에게 혹평을 퍼부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녀만의 독특한 힘과 에너지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가 이전의 상태로 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또한 알고 있다. 아무도 없는 시간 텅 빈 객석 앞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 소절 불러 보지만, 피아니스트는 지난번보다 소리가 호전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브루나는 여전히 마리아에게 좋은 감상평을 남겨 주지만, 그녀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 본연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그날, 페루치오와 브루나가 장을 보러 나간 사이 마리아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리로 난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부른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마치 그녀가 살아온 생을 관통하듯 흐르는 노래의 가사는 그녀의 마음을 절절하게 대변하고 마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백조의 노래처럼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 목소리는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어 세우고 마음을 붙잡고 호소한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생애를 담고 비통과 회한과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공중으로 흩뿌린다. 그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꽉 차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일렁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침 장을 보고 돌아오던 페루치오와 브루나 또한 집 아래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 그때 두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가 돌아왔다는 기쁨이 컸을까, 아니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까.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람의 눈앞에는 최후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기진한 마리아 '라 칼라스'가 쓰러져 있다.

영화 <마리아>는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일주일을 따라가며 그녀의 삶과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마리아> 스틸컷 / 출처. IMDb

# 2

테오도르는 그녀,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삶이 점점 온기와 활기로 채워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가 사만다를 만나기 전, 그의 상태는 무력하고 어두웠다. 오랜 연인과 이별을 했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고, 다른 사람들과 대면하거나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고 고독한 채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만다와 만나게 된 그는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테오도르의 감정에 세심하게 반응하고 재치 있게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테오도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사만다는 대화를 통해서 테오도르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치유하고 삶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준다. 이제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영화 <그녀>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그녀> 스틸컷 / 출처. IMDb

그녀, 사만다는 AI이다. 실체가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만다. 사용자의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사만다. 게다가 그녀의 목소리는 테오도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수많은 유저들과 접속해 그들 모두의 마음을 들어주는 범용 시스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목소리에 의존한다. 우리라고 별다르겠는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그녀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위로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함께 웃어주고 재치 있는 조언을 해주는데 말이다.

영화 <그녀>는 AI를 통해 외로움을 떨쳐내고 활기를 찾아가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마음 그리고 진정한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3

남자는 지금 폰 부스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공중전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쩐 일인지 그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부스를 나가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판이다.

영화 <폰 부스>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폰 부스> 스틸컷 / 출처. IMDb

그, 스투는 뉴욕의 잘 나가는 미디어 에이전트다. 전도유망하고 실력 좋고 매력적인 스투에게 어쩌면 삶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번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한 꺼풀 들춰보면 스투는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잘 나가는 에이전트의 모습 뒤에는 거짓과 모략으로 채워져 있고 멋진 남편의 모습 뒤에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하다.

그날도 스투는 공중전화를 찾는다. 그래야 바람피우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기에. 팸과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벨 소리가 울린다. 무심코 전화를 받은 스투의 귀에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를 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이다. 스투는 가볍게 장난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스투의 신상정보를 읊으며 그의 발목을 잡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스투는 폰부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락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설상가상 공중전화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옥신각신하게 되고 그 와중에 살인범으로 몰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제 스투는 전화를 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수화기 너머 목소리의 포로가 되어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영화 <폰 부스>의 목소리는 오직 목소리만으로 스투를 수화기를 손에 들게 한 채 폰부스를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다.

# 4

타고난 능력으로 앞길이 탄탄했던 경찰대생이었던 수아는 사고로 시력을 잃고 말았다. 안내견과 함께 일상을 새롭게 다져나가던 수아는 어느 날 실종사건과 연관이 있는 뺑소니 사고의 목격자가 되고 오직 청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차근차근 되짚으며 수사를 돕는다.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연결고리 하나가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더 이상 수사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두 번째 목격자가 나타난다. 우연히 사건 현장을 보게 된 기섭은 수아와 상반된 진술을 펼치게 되고 오히려 수사의 방향이 흐려지게 된다.

두 사람의 진술과 '목격'을 맞춰가면서 수아의 청각과 기섭의 시각이 가리키는 중요한 포인트가 발견되는데 이로 인해 수아는 범인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때 기섭이 앞이 보이지 않는 수아의 눈이 되어 주고 수아는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기섭의 목소리를 따라 질주한다. 그렇게 기섭의 목소리는 수아를 살려낸다.

영화 <블라인드>의 목소리는 이렇게 시각과 청각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 5

목소리.
누군가의 목소리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목소리는 상심한 마음에 큰 위로를 준다.
그 목소리는 일상의 항상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려준다.
그 목소리는 강인함과 단단함을 전달해 준다.
그 목소리는 희망을 주고 마음을 받치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런 것이다.
그 목소리를, 당신은 소중히 여겨주고 있는가.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

[인용 영화]

파블로 라라인 <마리아>, 스파이크 존스 <그녀>, 조엘 슈마허 <폰 부스>, 안상훈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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