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똑똑한 AI가 왜 시는 못 쓸까?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4 hours ago 1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인공지능(AI)에 시제를 주고 시를 쓰게 했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AI가 쓴 시는 조잡한 문장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맹탕이고 졸렬했다. AI에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 다시 쓰게 했으나 역시 신통치 않았다. 데이터라는 한계 안에서 매뉴얼대로 작동하는 AI에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없는데 어찌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는가? 내 결론은 ‘AI는 시를 못 쓴다!’였다.

AI란 “자본, 권력, 천연자원, 인간 노동, 데이터, 집단지성이라는 핵심 요소를 빨아들여 통계적 예측치로 변환”(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공저,

)하는 추출 기계다. 생각의 연결고리, 단계적 추론 능력에서 AI는 인간을 뛰어넘는다. AI는 인간을 놀라게 할 만큼 똑똑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으로 멍청한가? AI에 이런 문제를 내보자. 옷 다섯 벌을 햇볕에 말리려고 놔뒀는데 옷들이 마르는 데 다섯 시간이 걸린다. 서른 벌을 말리는 데는 얼마나 소요될까? AI가 내놓은 대답은 서른 시간이었다. 이 대답은 AI의 한계와 멍청함을 그대로 드러낸다.(박태웅, <AI 강의 2026> 참조)

직관과 상상, 사유의 발효 거쳐야

한 시인단체에서 ‘AI 시대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는데, 과연 시인이 이런 강연에서 얻을 것은 무엇인가? 생성형 AI의 창작 능력이 작가 영역까지 넘보는 데 따르는 불안과 염려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고유 경험치, 감정의 파동, 무의식, 상상력과 사유의 자율성이 없는 AI를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다. AI는 인간의 창작물을 데이터로 쌓고 그 모방품을 제공한다. “챗봇은 특정 작업에서 인상적 결과를 도출하지만 진정으로 흥미로운 글에서 나타나는 창의성과 개성은 부족하다.”(박태웅,

) 생성 AI가 보유한 데이터는 인간의 창작물에서 무단으로 훔친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 AI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작곡, 산업디자인, 엔터테인먼트산업에까지 두루 영향을 끼치지만 독창성과 개성이 요구되는 창작 능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시인이 봄을 소재로 시를 쓴다고 하자. 사람은 봄 날씨와 기운, 정취에 온몸으로 반응한다. 사람은 봄 냄새를 후각으로 분별하고, 천지간에 온갖 꽃이 개화하는 난만함을 시각 이미지로 뇌에 각인하며, 축축한 흙과 나뭇가지를 어루만진 촉각 등 경험의 총체를 지닌 존재다. 시인은 기억과 무의식을 뒤섞고 직관과 상상력을 융합한 뒤 사유의 발효 과정을 거쳐 비로소 시 한 편을 빚는다. 그러니 데이터에 축적된 타인의 창작물을 학습하고 모방하는 데 그치는 AI와 시작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AI에겐 감정의 굴곡, 창의성 없어

AI가 진화해도 김소월의 ‘봄비’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는 없다.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으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AI에는 감정의 굴곡과 창의성이 없다. AI는 데이터의 한계 속에서 문장을 조합한다. AI의 문장은 표준화되고 표현은 정제된다. 문법에 꿰맞춘 문장에 창의성과 돌올한 개성이 틈입할 수는 없다. 소월은 푸른 나뭇가지 같은 높은 이상과 빗속에 봄꽃 지는 서러움을 시로 표현해낸다. ‘봄비’에는 감정의 미묘한 파동, 창의적인 언어적 무늬, 유려한 리듬이 생동하는데 AI는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테다.

AI는 고작해야 “예술가 없는 예술, 인간 없는 창작”을 흉내 낼 뿐이고 그건 “‘지하도서관’에서 불법적으로 복제”해 얻은 것으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타인의 저작권을 훔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빈센트 밀레이의 ‘4월’ 같은 창의성이 번뜩이는 시를 AI는 쓸 수 없다. “목덜미에 햇살이 따갑고,/ 흙냄새도 좋다./ 죽음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뭐란 말인가?/ 땅 밑에선 구더기가 사람의 머리통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무(無),/ 빈 잔,/ 주단이 깔리지 않은 계단,/ 해마다 이 언덕으로, 종알종알 꽃을 뿌리며/ 4월이/ 바보같이 돌아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시인은 봄의 화사함 속에서 직관으로 해골과 사체를 파먹는 구더기를 보고, 피어나는 봄꽃 너머로 유령처럼 떠도는 무와 죽음의 징후를 통찰한다. 시의 리듬, 이미지, 연과 연을 잇는 솜씨는 전적으로 밀레이만의 것이다.

'비효율의 역설' 보여주는 게 시

왜 그 똑똑한 AI는 시를 못 쓸까? 인간 뇌는 의식과 무의식의 혼재, 불안과 백일몽, 더러는 그로테스크함에서 정동의 격류를 만든다. AI는 인간 뇌가 빠지는 망설임, 기이함, 비효율성을 배제하고 항상 속도와 효율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시는 차라리 비효율과 비생산성의 산물이다. 시 쓰기에는 느릿한 사유, 숱한 망설임, 사유의 발효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AI에는 이 모든 게 배제돼야 할 비효율성이다. 비효율성은 AI에 존재 근거와 그 이유를 박탈한다. 시는 비효율의 역설을 보여주는 장르다. AI는 그걸 배제하고 항상 효율의 극대화를 좇는다. AI는 의미를 넘어 무의미, 논리를 넘어 초논리로 나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오직 정답을 찾는 데 특화된 AI에 정답이 없는 시 쓰기를 주문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AI가 가져올 인류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소설가 장강명은 AI가 인간의 사고, 학습, 판단 능력을 대체하는 시대를 “먼저 온 미래”라고 명명한다. AI를 활용해 지구의 복잡계에서 생존 이익을 꾀하는 걸 나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AI를 사용해 글쓰기를 한다는데, 자율성과 상상력은 물론이고 애면글면하는 삶의 깊은 그늘에서 숙고와 양조를 거친 경험이 없는 AI가 매뉴얼대로 학습해서 써낸 시가 오죽할까? 시인들이여, 인간 뇌를 베끼고 예측 가능한 데이터만 활용하는 AI가 시를 쓴다고 불안에 떨 이유는 없겠다.

Read Entire Article